[이광호의 멍멍멍]

약자임을 증명하라

그 누구도 약자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약자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노약자석이다. 나이가 더 많고,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데 더 불편하다는 걸 증명해야 노약자석에 편히 앉을 수 있다. 반면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노약자석에 앉으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리를 삐었거나 전날 마신 술이 덜 깨 숙취로 고통 받고 있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론 교통약자라는 사실을 증명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다. 초기 임산부는 겉으로 임산부임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노약자석에 앉으면 다른 교통약자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다툼이 생겨나 자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임산부에게 배지를 지급하기도 했지만 실효성은 높지 않았다. 배지를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일부 좌석을 임산부 배려석으로 만들었으나 임산부에게만 별도의 좌석을 만들어주는 건 역차별이 아니냐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이 노약자석에 비해 반발이 큰 것은 격리돼 있던 공간 아닌 비노약자석에 마련됐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던 약자가 가시적인 공간까지 영역을 넓히자 본인들의 권리를 빼앗기거나, 불편을 초래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노약자석에 주인이 없듯 비(非)노약자석에도 주인이 없다.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정책이 시행된 것은 아쉽지만 애초에 주인이 아닌 사람이 권리를 빼앗겼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약자임을 증명해야만 받을 수 있는 배려는 모두에게 불편하다. 그래서인지 지하철의 노약자석은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 있다. 노약자끼리는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지만 비노약자석에 앉은 사람들은 노약자들을 마주하게 될 일이 없다. 지그재그, 혹은 곳곳에 노약자석이 배치되어 있는 독일이나 영국의 지하철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노약자는 자연스럽게 한켠으로 밀려나고 그들만의 공간에 격리되는 모양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픽사베이

사연1

당고개행 4호선 열차에서였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서서 가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고 그 중에는 척 보아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분들도 있었다. 몇 정거장을 지나자 빈자리가 났고 할아버지 몇 분이 서로 앉으라고 양보하는 훈훈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 별안간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 노인네들은 거기 안 앉아! 노약자석에만 앉지. 젊은 사람들이 욕해. 난 자리 많이 있어도 그쪽으로는 서서도 안 가!”
자리를 양보하는 다른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었다. 모른척 할까 하다 한 마디 거들었다.
“젊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앉으셔도 돼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니야, 난 거기 앉을 생.각.자.체.를.안.해!”
하고 또박 또박 힘주어 말하셨다. 그 사이에 다른 할아버지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훈훈한 다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환승역이 얼마 남지 않아 금방 내려야 했지만 할아버지는 자리에 앉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사연2

버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타이어 위 자리만 비어있어 불편함을 감수하고 앉아 가는 중이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할머니 한 분이 타시더니 비어있는 자리를 찾는지 손잡이를 잡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내 앞에 와서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조심스레 옆에 앉으며

“미안해요. 노인네는 노인네끼리 앉아야 하는데. 내가 오른쪽 다리가 안 좋아서 다리를 올려야 편해. 노인네 냄새나지?”

하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하고 반대편 자리를 보니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선뜻 자리에 앉지 못하고 주위를 살핀 건, 다리를 올려놓지 못하더라도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야 할지, 아니면 다리를 올려놓는 대신 젊은 사람과 앉는다는 불편함을 감수할지를 고민했던 것이었다. 노인들은 젊은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픽사베이

격리되는 약자들

노약자석의 존재가 타인의 대한 공감과 배려의 부재를 합리화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노약자석이 따로 있으니깐 노인들은 저쪽으로 가서 앉으라던가, 자신은 노인이니깐 노약자석의 주인인 것처럼 행사하는 것 모두 말이다. 전자는 배려의 의미를 잃은 것이고, 후자는 배려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 삼아 특정 집단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상호간의 격리는 서로를 낯설게, 불편하게,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명쾌한 해답은 없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배려는 선의라 해도 당사자에게 불쾌감이나, 배척당하는 기분이 들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실제 지하철에서 할아버지께 자리를 양보했다가 “내가 늙은인 줄 알아! 나 아직 튼튼하다고!” 하는 호통을 들었던 적도 있다. 겉모습만 보고 ‘노인이니깐 당연히 약자’라고 판단한 것에 불편을 느낀 것이다. 모든 사람이 특별한 대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것, 특히 그 대우가 약자라는 것에서 시작되는 경우엔 더욱 신중해야 함을 우리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한다. [오피니언타임스=이광호]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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