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현의 웃는한국]

[오피니언타임스=서용현, Jose] 지난번 한중정상회담, 이건 외교도 아니다. 외교는 ‘친구 만들기’다. 친구를 만들려면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은 ‘마음’은 없고, 책략으로 일관했다. 마음을 잃으면 모두 다 잃는다. 뭐 하러 돈 들이고 정상초청을 했던가? 역사를 보라. 홀대 받은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홀대한 나라가 망한다.

‘국빈방문’은 전형적인 책략이다. 시진핑은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사드> 문제를 국내정치용 카드로 잘 써먹었다. 그러나 <사드> 문제에 따른 한중관계 경색은 중국으로서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공산당 대회에서 집권 연장에 성공한 시진핑은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반한(韓) 정서에 불을 붙여놓은 중국 당국이 나서서 불을 끄는 것은 체면에 어긋났을 것이다. 그래서 고안해낸 묘책이 국빈방문이다. <사드>를 우회해서 유야무야하고 의전으로 때우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의 생각을 금방 눈치 챈다. 그것이 결례와 구타사건으로 연결된 것이 아닐까?

©청와대

이런 의미의 국빈방문이라면 ‘미끼’밖에 안 된다. 온갖 의전행사를 쫒아다니다보면 시진핑과 은밀하게 얘기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드>에 관해 솔직하고 비공식적인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국빈방문이 아니라 ‘비공식 방문’ 또는 ‘실무방문’이 더 적합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혹시 우리 외교 당국은 ‘레벨’이라는 미끼에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1990년 넬슨 만델라가 미국을 ‘개인 방문’ 했을 때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 수만 명이 운집했다. 이것이 진짜 국빈방문이다.

정상 방문은 멀리에서 친구가 찾아오는 것이다. 정(情)과 배려로 맞아야 한다. 당연히 그 핵심은 정상 간의 단독회담이다. 단 둘이 한 잔 하며 허심탄회한 얘기를 했으면 더욱 좋았다. 그런데 중국 측은 단독회담을 극소화하고 의전으로 돌렸다. 친구가 왔을 때, 스스로 만나지 않고 ‘의전 뺑뺑이’로 돌리는 것과 같다. 난징 대학살 기념행사 등으로 일정변경이 생겼거나 기자단 폭행 사건이 생겼으면 최소한 직접 전화를 걸어 유감을 표했어야 했다. 그래야 대인(大人)의 외교다. 그러나 중국은 대인 폼을 잡느라고 소인 외교를 연출했다. 이런 외교는 안 하는 게 낫다. 부잣집 잔치에 초대 받아 갔다가 마음의 홀대를 받은 손님은 마음에 독(毒)만 쌓을 뿐이다. 한국에 그랬다면 다른 ‘손님들(변방국)’에게는 안 그랬을까? 그들도 마음에 독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아무리 부자라도 세계화 시대에 ‘마음의 왕따’가 될 뿐이다. 이것은 역(逆)외교다.

진짜 불쌍한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아직도 외교를 모른다. 삼국지 식의 투쟁의 수단으로 본다. ‘이기고 지고’로 본다. 변방 소국을 ‘다스리는’ 차원에서 본다. 항우가 ‘홍문의 연(宴)’에서 주연을 베풀면서 모사 범증(范增)이 유방을 죽일 자객을 보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외교가 오늘의 세계에서 통하는가? 지금은 ‘투쟁의 시대’가 저물고 ‘상호의존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정보화로 ‘책략’을 감추기가 어려워진다. 변방 소국도 눈치가 뻔하고, 또 세계화로 사방에 친구를 만들 수 있으므로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 상대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중국은 이런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 하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투쟁의 사고방식’에 절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삼국지를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런 나라는 세계화 시대, 상호의존의 시대에 진정한 대국이 될 수 없다.

필자는 ‘투쟁에서 상호의존으로’ 가는 변화가 이 시대의 저류(低流)라고 본다. 그러나 중국은 물론, 다른 강대국들은 이 저류에 눈이 멀어 있다. 한국 같은 나라들도 투쟁의 멘탈리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중국방문에 대해 알현, 홀대, 굴욕, 수모라고 보는 시각도 ‘투쟁의 시각’이다. 그러면 우리도 소인이 된다. 방문한 집 개가 짖는다고 화 낼 것인가? ‘눈을 뜨지 못하는’ 이웃 중국을 연민과 이해의 눈으로 보자. 그것이 바로 상호의존의 시각이다. 찰스 다윈은 “가장 강하거나 영리한 종(種)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種)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우리가 상호의존으로 가는 개벽(開闢)을 선도할 수 있으면 우리가 대국이다. 옛날 로마, 몽골이 나라가 커서 대국이었던가?

*필자는 ‘투쟁에서 상호의존으로’ 가는 역사적 개벽(開闢)에 관해 오피니언타임스에 후속 기고를 할 예정이다.

 서용현, Jose

 30년 외교관 생활(반기문 전 UN사무총장 speech writer 등 역임) 후, 10년간 전북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중.

 저서 <시저의 귀환>, <소통은 마음으로 한다> 등. 

‘서용현, Jose’는 한국이름 서용현과 Sir Jose라는 스페인어 이름의 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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