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의 글로 보다]

[오피니언타임스=김동진] 2015년 여름,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메르스 사태,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그 전에는 신종플루도 있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스도 있었다. 셋의 공통점은 전염병이라는 것이다. 전염병 환자는 완치될 때까지 격리된 채 치료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메르스 감염 환자가 완치 후에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메르스를 앓았던 사람들만 따로 격리해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르스에 걸린 것은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며 감염자를 죄인 취급하고, 심지어는 유전의 가능성이 있다며 강제로 불임수술과 낙태수술을 하고, 갓 태어난 아이를 부모와 강제로 떨어뜨려 살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냐며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고, 지금도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부산에는 용호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지금의 용호동은 오륙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태종대만큼이나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이기대 생태공원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버려진 땅이었다. 그런데 그 버려진 땅에 어떤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한쪽 면은 바다를 향하고 반대쪽 면은 고개로 막혀 있어 완벽히 고립된 땅, 토양마저 척박해 조선시대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몰랐던 그곳에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았던 걸까? 그들은 왜 그곳에서 살게 되었던 것일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한센병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한센병은 전염성 피부병으로 다른 병과는 달리 완치된 후에도 얼굴과 몸에 심각한 병의 흔적을 남기는 병이고, 한센인은 한센병을 앓았던 환자를 부르는 말이다. 지금은 나병 균을 발견한 노르웨이의 의사 이름을 따서 한센병, 한센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원인이 되는 균의 이름을 따 나병, 피부가 문드러진다고 해서 문둥병으로 불리었다. 부산에서는 한센병을 문디병, 한센인을 문디라고도 불렀다.

한센병은 ‘천형’이라고도 불리었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형벌(天刑)이라는 뜻이다. 한센인은 하늘이 내린 벌을 받은 아주 몹쓸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센인들은 정말 용서받지 못할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러서 병에 걸린 것일까? 아무리 의학적인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한센인을 죄인 취급한 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중세 유럽에서도 마땅한 치료약이 없고 깊은 상흔을 남기는 한센병을 신의 저주라 부르며 한센인들을 격리시키고 때때로 집단 학살했다고 하니 한센인들에 대한 미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왜 사회와 사람들은 그렇게도 가혹한 대우를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지니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숨어살 수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실제로 한센병은 전염병이긴 하지만 전염성이 약해서 지금은 법정 제3군 전염병으로 지정되어 간단한 처방으로 치료가 가능하고 발병률도 지극히 낮다. 한센병이 완치율 100%가 안 되는 이유는 병의 원인 균이 약해 실험실에서 배양이 안 되어 완벽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라고 하니 전염이나 유전 가능성도 극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센인들은 외부와 격리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염과 유전을 이유로 강제로 불임 수술과 낙태 수술까지 받아야했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런 가혹한 처우에도 한센인들은 불평 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그들은 몹쓸 병에 걸린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1899년 촬영된 외국의 한센병 환자 모습. 한센병은 법정 3군 전염병으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배척받아왔다. ©플리커

용호동은 부산 지역 한센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곳에 산 것은 아니다. 한센인들의 격리는 한센병 치료 전용 병원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부산에서는 사하구 감천동과 영도 동삼동을 거쳐 용호동에 국립 용호병원이 지어졌고 1975년에 용호병원이 용호농장으로 변경되면서 그곳에서 한센인들이 경제활동을 하며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감천동과 동삼동에서 이전을 하게 된 것은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요즘 사드 배치로 나라가 시끄럽듯, 과거 방사능폐기물 처리장 선정 등으로 갈등이 많았듯, 한센인들의 거주지는 말 그대로 혐오시설이었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동네에 그런 시설이 들어서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오지에 가까웠던 용호동에 별다른 반대 없이 들어오게 됐다.

주민들의 반대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한센인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 용호동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오랫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불편한 몸으로 일구고 그곳에 농장을 만들어 돼지와 닭 등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들은 바다를 향하고 있는 비탈길 지형을 그대로 살려 자연에 대한 훼손이 거의 없는 허름한 집을 지어 살아갔다.

한센인들이 살았던 집은 모두가 바다로 창이 나있었다고 한다. 넓고 푸른 바다를 보며 평생 고립되어 살아가야 하는 적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그랬을 수도 있지만 비록 고개로 막혀있다고는 해도 언덕만 넘으면 갈 수 있는 부산 시내 쪽으로 창을 내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들도 당당하게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그들은 시내로 향하는 방면으로 창문 하나 내지 못한 채 그곳에서 고립되어 살아갔다. 그들은 굽은 손으로 농장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같은 고기와 달걀이라도 한센인들이 생산했다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가고 그 마저도 판매가 어려울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마디 불평도 없이 살아야했던 것이 한센인들의 삶이었다. 사회에서 격리된 채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공동체를 꾸려갔지만 외부로부터 격리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고립감을 주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살아간다는 안정감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행복한 공간도 점점 위협을 받게 된다. 88올림픽 개최로 인한 개발 열풍으로 도시 근교에 대한 사회와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도성장시대를 거치며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풍요를 이룬 사람들은 이제 여가생활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시 근교의 농장은 이제 환경적으로도, 비용대비 효율성으로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개발로 인해 땅값은 나날이 올라가는데 그곳에 환경에 부담을 주는 농장 같은, 그것도 한센인이 운영하는 시설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혐오시설을 철거하고 그곳에 도시인들의 여가 생활을 즐길 자연 생태적인 공간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오랫동안 한센인들의 터전이었던 용호동도 이제 더 이상 버려진 척박한 땅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즐길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공간으로 바뀌고 그곳에 고층아파트와 생태공원이 들어서기로 결정되면서 결국 한센인들은 처음에 강제적으로 용호동으로 들어왔듯 떠날 때도 강제로 그곳을 떠나게 됐다.

그들이 용호동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층아파트와 아름다운 자연생태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 이곳이 오랫동안 한센인들의 동네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혹시라도 부산의 용호동을 찾는 분이 있다면 그 아름다운 해안 산책길을 걸으며 그 곳에 살았던 한센인들을 조금이라도 기억해주면 좋겠다. 부끄럽고 아픈 기억은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있어야 했는지 알게 된다면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장애인, 성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고 여러 지원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센인들은 빠져 있다. 아직까지도 한센인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의 구성원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용호동을 떠난 한센인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센인들이 살던 동네는 사라졌지만 한센인들마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게 할 순 없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래선 안 된다. 그들도 엄연한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더 이상 그들을 우리 사회에 없는 사람처럼 지워내선 안 된다.

김동진

한때 배고픈 영화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들 독서수업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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