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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배움터 ‘양원 주부학교’[이종원의 프리즘 속 세상]
이종원 | 승인 2017.12.28 10:19

[논객닷컴=이종원] 읽고 쓰기 쉬운 한글 덕분에 기본 문맹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우리나라에 여전히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어려서는 오빠와 남동생에게 밀려서, 시집가서는 남편 건사하고 아이들 돌보느라 배울 기회를 놓친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이다. 서울 마포구 양원주부학교는 반평생 한글을 읽지 못해 숱한 설움을 안고 살아왔던 지난날의 아픔을 딛고 ‘배우는 즐거움’으로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늦깎이 배움터’다.

늦깎이 학생들이 국어시간 받아쓰기에서 100점을 받은 공책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종원

예년에 비해 빠른 동장군의 위세로 한파경보가 발령된 12월 중순. 방한복과 모자로 중무장을 한 채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들어가는 할머니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교실마다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60대부터 80대의 어르신들의 첫 시간 수업은 ‘국어’다.

수학은 인기가 높은 수업이다. 한문제 한문제 풀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종원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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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삶아 먹자” “감기가 옮았다” 자음 중에서 ‘ㄹㅁ’을 익히는 중이다. 글자 하나라도 놓칠세라 또박또박 큰 소리로 따라 읽는 할머니들. 투박하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거친 손은 몽당연필과 닮았다.

글자 하나라도 놓칠세라 또박또박 큰 소리로 국어책을 따라 읽고 있다.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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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로 또박또박 한 자씩 써내려가는 정성과 열기가 온 교실에 가득하다. 어려운 부분에선 멀쩡한 돋보기를 탓하기도 하고 뒷사람 공책을 슬쩍 엿보기도 한다. 그래도 한 글자 한 글자 익혀나가는 재미가 남다르다.

꼭꼭 눌러 쓴 글씨 한 자 한 자마다 정성이 담겨 있다. ©이종원

이어지는 수업은 모두가 기다리던 ‘수학’시간이다. 칠판에 적힌 더하기 문제를 나와서 풀어야 한다. 담당교사 이정옥씨가 맨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를 지목했다. 공책에서 풀 때는 잘 됐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하려니 자신이 없어진다. 15+6은? 이 교사가 거들어 준다. “5에 6를 더하면 11이죠? 그래서 하나가 올라가면 십자리에는?” 틀렸을까봐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2’자를 적어 넣는다. “참 잘 하셨어요”라는 칭찬과 함께 박수를 쳐준다. 이 교사는 “종을 쳐도 계속 질문을 할 만큼 열띤 수업”이라고 말했다.

국어 총괄평가에서 우수상을 받고 좋아하는 할머니.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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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다니는 각자의 사연은 다르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하나같이 뜨겁다. 박길자(70) 할머니는 글을 몰라 답답했던 원을 풀고 싶어 친구 세 명이 함께 다닌다. 글을 배워 노래방에도 가고 식당에서 메뉴도 시켜보고 싶은 게 소원이다.

과학시간에 혈액형 판정실험을 해보고 있다.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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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순(66) 할머니는 요즘 손자들과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서너 살 된 손자들이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할 때면 얼굴 보기가 민망했었다”며 “이젠 안심하고 손자들 재롱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향하는 할머니들의 발걸음이 활기차다. ©이종원

팔순을 코앞에 둔 송순분(79) 할머니가 학교를 찾은 이유는 배우지 못해 겪었던 ‘서러움’ 때문이다. “책보자기를 메고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담장 밑에 숨어 지켜보며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어릴 적을 회상한다. “은행에서 이름을 못 써서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게 얼마나 창피했던지...” 지금은 신문도 어느 정도 떠듬떠듬 읽으며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다.

1단계 수업은 구구단을 외우고 한글을 깨우치는 일이다. ©이종원

양원주부학교는 지난 1982년 주부학생 12명으로 출발했다. 연령에 제한 없이 누구나 다닐 수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주부들을 위한 기초반부터 중·고등부까지 있으며 1년 과정으로 매년 3월, 9월 선착순 모집을 한다. 그동안 배움에 목말랐던 수많은 주부들이 새 삶을 찾았다.

이정옥 교사가 할머니들에게 수학의 단위에 대한 수업을 하고 있다. ©이종원

이선재(82) 교장은 “어려운 시대에 교육의 기회를 양보했던 분들이므로 사회가 보상을 해 주어야 마땅하다”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쉬는 시간에는 당번이 칠판 청소를 한다. ©이종원
공책위에 놓인 돋보기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 하다. ©이종원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웅크린 채 살아온 이들. 이제 미래를 향한 열정으로 뒤늦게 연필을 잡았다. 그들은 뒤늦게 잡은 배움의 기회를 값진 꿈과 행복으로 일궈가며 투박한 손으로 ‘행복’이라 눌러 적는다.

 이종원

 서울신문 전 사진부장

 현 서울신문 사진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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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jongw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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