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송의 어둠의경로] 영화 ‘침묵의 시선’

[오피니언타임스=서은송] 이 영화는 1965년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의 경우 배우가 당시 상황을 재연해 연기하는 방식이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액트 오브 킬링>의 후속작인 만큼 실제 사건 가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스토리를 구성했다. 전편과 다른 것이 있다면 가해자의 눈이 아닌, 피해자의 눈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관련기사: 액트 오브 킬링, 가해자가 승리한 세상

영화는 학살 피해자 람리의 집에서부터 출발한다. 람리의 동생 아디는 안경사라는 직업을 매개로 자신의 형을 학살한 당사자들을 한사람씩 만난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우호적이지 않다. 학살자들은 물론 피해자 가족의 어머니조차도 시끄럽게 문제를 만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아디는 자신이 시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사과 한마디를 듣고 싶고 그러고 나면 용서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한사람씩 대면한다.

물론 아디가 만난 학살자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어떻게 죽였는지를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을 뿐이다. 하나같이 당연한 학살이었다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나마 마음이 움직인 자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과거일이니 들쑤실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디는 인내심을 갖고 학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씩 퍼즐을 맞춰나간다. 그러다 결국 학살자들의 거짓말에 분노한다.

람리를 죽인 학살자 가족들은 처음에는 자기 아버지 행동을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 학살당한 당사자가 자신의 형이라고 이야기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대신 사과한다. 아디는 촉촉해진 눈으로 가해자 가족을 부둥켜안는다.

영화가 시작되어 끝이 날 때까지 번데기는 그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했다. 엔딩 크레딧의 절반 이상인 ANONYMOUS(익명)라는 이름의 영화관계자들과 영화 속에 숨어 있는 피해자들도 그 두꺼운 악의 정당화를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학살 가담자들이 사회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람리 동생이 살아가고 있는 마을의 시장이나 선생님들은 거의 대부분 학살 가담자들이다. 이러한 사회구조를 손가락질하기에는 한국사회 또한 그렇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부 기득권층조차 과거 독재정권 시대에 완장을 찼던 이들이니 더더욱 영화 속 사회를 비판할 수 없었다.

“덮은 것을 뭐하러 들춰내. 아문 상처를 뭐하러 긁어.” 같은 실수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근원을 엿본 느낌이었다. 마땅히 들춰내야 할 ‘진실’을 밝히려는 람리의 동생에게, 그의 어머니와 부인, 주위 사람들 모두 뭐하러 그런 짓을 하냐며 조심하라고 그를 비난했다. 피해자들마저 세상이 뒤집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정의를 일으켜야 할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니 악의 정당성은 더 깊은 뿌리를 뻗어내고 어두운 기득권층이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이 100만 명을 죽이게 했으며, 무엇이 100만 명을 죽이고도 죄책감하나 없게 했는지, 왜 학살자들은 그렇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지, 왜 무고한 100만 명의 죽음을 알고도 이 사회는 조용한 것인지를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내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영화 중간마다 나오는 변하지 않는 번데기의 미약한 움직임은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듯 했다. 이 영화는 <액트 오브 킬링>과는 다르게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시선으로 촬영되었다. 만약 처음에 접한 영화가 이 영화였다면 가해자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찼으리라 생각한다. 학살을 행한 장소에서 신이 나서 추억 되새기듯 학살 장면을 따라하거나, V자를 하고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액트 오브 킬링>을 보고 난 뒤에 보았던 터라 그나마 덜 충격적이었다.

“람리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뭘 어쩌겠어. 그때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정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대량 학살의 가해자들을 보며 한국사회와도 너무 비슷한 것 같아 씁쓸함이 배로 커졌다. 일말의 가책도 없이, 악의 정당성을 운운하며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가해자들의 모습은 한국 정치인들을 연상시키곤 했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한 것은 단순한 악의 정당화였을까. 그는 피해자들의 시선과 태도를 알리고자 했으리라. 그들이 약자가 되어버린 세상과, 약자들 사이에서도 ‘적응’하는 것이 ‘최선’이 되어버린 현실을 알려주려 한 것이다.

영화가 끝나도록 미미한 움직임만 일으켰을 뿐, 결국은 깨어나지 못한 번데기처럼 말이다. 언제쯤 날개를 돋을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는 관찰자 시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서은송

2016년부터 현재, 서울시 청소년 명예시장

2016/서울시 청소년의회 의장, 인권위원회 위원

뭇별마냥 흩날리는 문자의 굶주림 속에서 말 한 방울 쉽게 흘려내지 못해, 오늘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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