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툭 떨어져 ‘대중의 꽃’으로 다시 피네

차(茶)나무과의 상록 활엽 소교목으로 학명은 Camellia japonica L.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한파 경보까지 발령되는 등 맹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립니다. 땅도 얼고 강도 얼고 호수도 얼어붙으니, 산도 얼고 나무도 얼어 모든 생명의 맥박이 멈출 듯싶은 한겨울입니다. 이런 와중에 늘 푸른 이파리를 풍성하게 간직한 채 사이사이 진홍색의 꽃망울을 터뜨리니, 가히 ‘겨울왕국의 프리마돈나’라 일컬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한겨울에도 잣나무나 측백(側柏)나무처럼 잎이 푸르다고 해서 ‘동백(冬柏)’, 또는 ‘동백(棟柏)’이란 한자어가 이름의 앞머리에 붙는 동백나무가 장본인입니다.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 옆 작은 못에 핀 동백꽃. “나그네 근심 덜 일 하나 있으니/ 산다(山茶·동백나무)가 설 전에 벌써 꽃을 피웠네.(다산의 ‘객중서회(客中書懷)’에서)” 유배 온 다산이 바라보며 타향살이의 근심 하나를 덜었다는 동백꽃이 바로 저 꽃이었을까 궁금하다. ©김인철

학명의 종명에 일본을 뜻하는 ‘자포니카(japonica)’가 쓰일 만큼 일본 전역이 주요 원산지인 것은 맞지만, 우리나라와 중국, 타이완에서도 폭넓게 자생하는, 동아시아의 대표 식물이라는 게 식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제주도를 비롯해 오동도와 거문도 등 남해 섬과, 동해의 울릉도, 서해의 대청도와 백령도에 이르기까지 섬 지역에 널리 자생합니다.

©김인철

뭍에서는 고창 선운사와 강진 백련사, 충남 서천의 마량 동백나무숲 등이 동백나무 군락지로 유명합니다. 이름난 군락지는 아니어도 충청 이남의 웬만한 산사(山寺) 주변에 동백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방화림(防火林)에 적합한 상록활엽수로서 활용됐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11월 하순 꽃망울을 터뜨린 부산 해운대 동백섬의 동백나무.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으로 시작하는 불후의 명곡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김인철

흰 눈이 쌓인 푸른 이파리 사이로 붉게 핀 ‘겨울 꽃’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동백꽃이 피기 시작하는 건 늦가을부터입니다. 지난해 11월 하순 만개한 둥근바위솔을 만나러 부산 해운대 동백섬에 갔다가 혹시나 하고 고개를 들곤 여기저기서 꽃망울을 터뜨린 동백꽃을 제법 여럿 보았습니다. 덕분에 1972년에 발표돼 지금까지 국민가요의 하나로 꼽히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대목인 ‘꽃 피는 동백섬’을 눈으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올레길에서 만난 동백꽃.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국민가요’란 말이 결코 과하지 않은 ‘동백 아가씨’의 노랫말대로 금지곡 지정으로 가수 이미자는 물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울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야만의 세월’이었을 뿐이다. ©김인철

참 일찍이 청마 유치환이 시 ‘동백꽃’에서 노래했듯 ‘목 놓아 울던 청춘의 피꽃’으로 피었다가 절정의 순간 통째로 미련 없이 툭 지는 처연한 특성 때문일까, 동백꽃은 고답적인 문학작품뿐 아니라 대중문화에서도 크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1964년 발표돼 무려 35주 동안이나 가요 순위 1위를 차지했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그런데 이 노래가 왜색풍(倭色風)이라는 이유로 수십 년간이나 금지곡으로 지정됐었는데, 일본만이 동백나무의 자생지라고 오해한 무지가 빚은 폭정의 과거사를 보는 듯해 헛웃음이 나옵니다. 동백꽃은 이후 송창식의 ‘선운사 동백꽃’이 되어, 정태춘의 ‘선운사 동백꽃이 하 좋다기에’가 되어 다시 또 대중의 사랑을 받습니다.

©김인철

동백꽃의 통속적 이미지는 서양인들에게도 비슷하게 느껴졌던 듯싶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1848년 ‘동백 아가씨(La Dame aux Camelias)’란 제목의 연애소설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고, 이를 토대로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가 1855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를 작곡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요즘도 국내서 종종 일본식 한자 표기인 ‘춘희(椿姬)’란 이름으로 무대에 오르는 바로 그 오페라입니다.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앞마당에 피어 있는 흰 동백꽃. 한라산에 자생하는 동백나무의 씨를 받아다 키웠다고 한다. ©김인철

한겨울 눈물처럼 지는 동백꽃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은 아마 제주도일 것입니다. 몇 해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올레길이 한겨울 동백꽃을 완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코스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의 숲과 골짜기, 마을과 골목길을 찬찬히 걷다 보면 키 10m 넘는 자생 동백나무는 물론, 수십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룬 군락, 나지막한 현무암 담장 위에 올라앉은 분재형 동백나무 등 다양한 형태의 동백나무와 붉은 꽃송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앞마당에선 한라산에 자생하는 동백나무의 씨를 받아다 키웠다는, 단아하고 기품 있는 흰 동백꽃도 볼 수 있습니다.

눈물처럼 후드득 통째로 떨어진 둥백꽃. 절정의 순간 툭 떨어져 바닥에 가득 쌓이는 때문일까, 흔히 동백은 나무에서 한 번, 땅에서 다시 한 번 꽃을 피운다고 한다. ©김인철

동백나무는 대표적인 조매화(鳥媒花)입니다. 벌·나비가 거의 없는 늦가을부터 이른 봄 사이 꽃이 피기에, 곤충보다는 새들에 의지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이지요. 특히 새는 사람의 눈처럼 붉은색을 붉게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새들도 붉은색을 자극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동백꽃은 이런 새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 붉게 더 붉게 타오른다고 합니다. 동박새는 동백나무의 농밀한 꿀을 빨면서 꽃가루받이를 돕는 새들의 하나인데, 그 이름도 동백나무에서 따왔습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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