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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예술가, 하지만 그 한계를 뛰어 넘은 작품[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겸재 정선
서동철 | 승인 2018.01.15 14:36

[논객닷컴=서동철] 지난 연말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5건이 새롭게 보물로 지정됐다.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과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풍악내산총람도(楓嶽內山總覽圖), 청풍계도(淸風溪圖),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가 그것이다.

‘5점’이 아니라 ‘5건’이라고 한 것은 해악전신첩과 경교명승첩 때문이다. 해악전신첩은 1747년 겸재가 금강산의 경치를 21폭 그림으로 묶은 것이다. 경교명승첩은 양천현령 시절인 1740~1941년 이름처럼 도성 밖 한강 주변의 경치를 역시 33폭에 담은 화첩이다.

1984년 국보로 지정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문화재청

겸재의 그림이 국가지정문화재에 오른 것은 당연히 처음이 아니다. 앞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금강전도(金剛全圖)가 1984년 동시에 국보가 됐다. 육상묘도(毓祥廟圖)가 1986년, ‘해악팔경(海嶽八景) 및 송유팔현도(宋儒八賢圖)’ 화첩이 2013년, 풍악도첩(楓嶽圖帖)이 2015년 각각 보물로 지정됐다. 가장 많은 국가지정문화재를 가진 화가다.

개인적으로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끔 갈 때마다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현대미술관에서 바라보는 인왕산은 인왕제색도의 구도와 닮았으되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미술관 카페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 인왕산은 옆으로 넓게 퍼져있지만 인왕제색도의 인왕산은 좌우폭이 훨씬 좁다.

한국문화사에서 차지하는 겸재의 위치는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의 설명이 들을 게 많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번에 한꺼번에 보물로 지정된 겸재의 작품 5건도 모두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는 삼성미술관 리움,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은 용인대박물관, 풍악도첩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갖고 있다. 육상묘도는 개인 소장품이다.

최완수 실장은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퇴계 이황이지만, 조선 성리학을 확립한 것은 다음 세대인 율곡 이이라고 설명한다. 이른바 율곡학파가 문화 전반에서 독특한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내는데, 특히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한 뒤에는 이른바 중화(中華)의 전통이 중국에서는 사라졌지만 조선이 면면히 이어간다는 조선중화주의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음 김상헌의 증손으로 6창(六昌)이라 불리며 문단을 주도한  김창집·김창집·김창흡·김창업·김창연·김창립 6형제를 비롯한 문인들이 백악사단(白岳詞壇)을 형성하며 진경시문학을 일으키고, 특히 삼연 김창흡의 제자인 겸재가 진경산수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들을 장동 김문(壯洞 金門)이라 부르는데, 청운동 언저리인 장동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26일 보물로 지정된 겸재의 청풍계도. ©문화재청

겸재가 태어난 곳도 이 주변이다. 지금 경복고등학교 교정에는 겸재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화성(畵聖)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집터’라는 제목의 표석에는 겸재의 자화상이라는 독서여가(讀書餘暇)가 부조되어 있다. 기념비 뒷면에는 ‘겸재의 진경산수화 산실’이라는 경복고 33회 졸업생 최완수 실장의 글이 새겨졌다.

정치적으로 율곡 이이는 서인의 영수다. 청음 이후 장동 김문은 대표적인 노론 집안이다. 조선 후기 노론의 권력 독점은 세도정치로 이어졌고, 결국 조선의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파당(派黨)의 문화적 지향을 조선 고유색이라고 긍적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지 의심도 갖게 된다.

겸재는 철저하게 노론에 속했던 인물이다. 그는 과거의 첫 단계인 사마시(司馬試)도 거치지 않았고 증조부 이래 관직에 나가지 못해 음서(蔭敍)도 막혀 있었다. 그럼에도 만년에 종2품 가선대부지중추부사에 제수된 것을 당대의 화업으로 이룬 성취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결국 노론계 인사들의 적극적인 후원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왕제색도는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문이 살던 장동에서 바라본 구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겸재의 경교명승첩 가운데 미호(渼湖). ©문화재청

실제로 겸재의 작품 주제 선정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청풍계도는 선원 김상용의 옛집을 그린 것이다. 선원은 청음의 형으로 병자호란 당시  원손(元孫)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성이 함락되자 순절한 인물이다.

경교명승첩을 이루는 그림의 하나인 미호(渼湖)도 그렇다. 경기도 남양주 수석동의 한강변 경치를 그렸는데 석실서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석실서원은 김상용과 6창의 아버지인 문곡 김수항, 김창집·김창협·김창흡 형제 등을 배향했다.

겸재는 양천현령 시절 양천팔경(陽川八景)을 그리기도 했다.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다. ‘팔경’은 주로 빼어난 명승을 간추려 쓰는 표현이지만, 양천팔경은 조금 성격이 다르다. 소재의 대부분이 세도가 별서(別墅)이기 때문이다.

겸재는 정치적인 예술가였지만, 이런 사실이 오늘날 그의 명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예술이 정치와 무관한 적은 없었다. 물론 작품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것이 중요해 보이는 시기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예술이란 결국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치적이었지만 정치적 한계에서 벗어난 겸재는 보여주고 있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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