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에서 쓰는 편지]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그녀는 젊고 고왔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흔히 쓰던 단어, “새댁”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어느 도시의 음식점에서 만난 중국인 종업원 이야기입니다. 주문을 받는데 한국말이 무척 서툴렀습니다. 서투른 정도가 아니라 음식점에서 꼭 필요한 몇 마디 말만 급하게 배운 모양이었습니다. 묻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우리말에 익숙한 조선족이 아니라 한족이었겠지요.

주문을 받은 그녀가 방에서 나가고 잠시 뒤,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상황이 저절로 그려졌습니다. 누군가 쟁반을 들고 가다가 통째로 엎어버린 게 틀림없었습니다. 한데, 시끌시끌한 소리에 섞여 낮지만 명확한 목소리 하나가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중년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한 번도 아니고 연속으로 괜찮다고 도닥이고 있었습니다. 목소리에 배인 따뜻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왔습니다. 어떤 상황이길래 저럴까? 궁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슬그머니 내다보고 말았지요.

©unsplash

상황은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까 그 ‘중국인 새댁’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그 앞에는 내팽개쳐진 그릇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새댁’은 놀랐는지 무안한 건지 아니면 속상해서 우는 건지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고,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연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면 살풍경이어야 할 상황이 어쩌다가 그렇게 따뜻한 풍경으로 바뀌었는지. 괜찮아! 괜찮아! 하는 소리가 왜 제게 전하는 위로처럼 들리던지요.

지난해 자주 접했던 속상한 뉴스들이 기억나서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외국인 청년들의 잇단 자살소식이 가슴에 큰 무게로 얹혀 있었습니다. 머릿속에는 한 이주노동자가 남겼다는 문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없습니다. 저를 누군가 데리고 갔습니다. 꿈이 많았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누가 그를 ‘없게’ 했을까요. 많았다던 꿈은 누가 빼앗아 갔을까요. ‘사람이 먼저’라는 세상에 젊은 생명이 그렇게 죽어야 하는 현실이 아팠습니다. 누군들 머나먼 타국 땅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다 죽고 싶을까요.

문제는 이게 한 두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비극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지역 시민단체인 ‘경남이주민센터’와 ‘주한네팔인교민협의회’가 주한네팔대사관을 통해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주한 네팔인이 총 36명이었다고 합니다. 네팔 청년들만 이주노동자로 오는 것이 아니니 전체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겠지요. 자살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한국에서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해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네팔 청년의 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회사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았고,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안 되고, 네팔 가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안 됐습니다.”

©픽사베이

임금체불과 사업주의 욕설, 심하게는 폭력에 시달린다는 고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많아지면서 부작용도 늘고,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볼멘소리도 들려오지만, 어차피 우리가 필요해서 도입한 제도입니다.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에 폐지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그런데도 그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개인 문제로 치부하고 말아야 할까요? 우리 청년들도 일자리를 못 구해 목숨을 끊는 게 현실이라며 끝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해야 할까요?

그런 일들이 목에 갈린 가시처럼 아프던 참에 그릇을 통째로 깬 외국인 종업원을 감싸 안고 토닥거리는 주인을 본 것입니다. 그 순간은 칼날 위에 선 듯 위태해 보이던 세상이 느닷없이 따뜻해 보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바닷가의 음식점에서 또 다른 풍경을 보았습니다. 종업원이 서넛쯤 되는데 모두 중국인이었습니다. 제 관심을 끈 것은 그들 전부가 주인처럼 당당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서 있거나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고기들이 유영하듯 잠시도 쉬지 않고 손님들 사이를 누볐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문에서부터 서빙, 손님의 불만을 해결하는 일, 계산까지 중국인 종업원들이 해내고 있었습니다. 너무 뜻밖의 모습이라, 음식에 머물러야 할 제 눈은 내내 그들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주인이 그만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겠지요. 마음의 넓이가 그 정도는 되었을 테고요. 아니, 그 전에 종업원들이 신뢰를 얻을 만큼 잘했기 때문에 형성된 관계일 것입니다. 그런 식의 시스템이 바람직하냐 아니냐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인종이나 국적, 출신성분 같은 것이 사람 그 자체보다 먼저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사람이 사람을 잃어버리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임을 포기하고 나면 돈과 욕심과 강탈 같은 동물적 단어만 남기 마련입니다.

중국과의 갈등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지금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도 쫓아내자는 주장이 나오는 판에, 누구에게는 이 글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후대에게 물려줄 이 나라는 사람이 사는 나라여야 하니까요.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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