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알베르 까뮈 <이방인>(L'Étranger)

[오피니언타임스=김호경] 말은 쉽지만 ‘열린 사회’를 만드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반대말을 ‘닫힌 사회’라 한다면 그 사회는 우리의 일상과 행동을 옹골차게 지배하고 있다. 모두가 김치찌개를 주문할 때 “나는 비빔밥 먹을래요”라고 말하면, 압박의 눈길이 쏟아진다.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작스레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이방인은 별다른 게 아니다. 코끼리 무리 속에 기린이 있다면 이방인이고, 백인 무리 속에 몽골인이 있다면 이방인이고, <명량>이 좋은 영화라고 입을 모을 때 “난 재미없던데” 말하면 이방인이 된다. 열린 사회가 아니라 닫힌 사회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한번은 이방인이 되어본 적이 있다. 나는 멀쩡한데 사람들은 나를 흘긋거리며 이상한 사람, 음흉한 사람, 조화를 파괴하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고, 창문도 열지 않았는데도 변태, 괴짜, 예비 범죄자가 된다. 그래서 나는 따돌림 당한다(그런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도 있다).

만약, 어머니가 사망했음에도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방인일까? 어머니의 빈소를 지킬 때 담배를 피웠거나 커피(카페오레)를 마셨다면 이방인일까? 그것이 별개의 살인죄를 다루는 법정에서 심리(審理)에 영향을 미쳐야 할까?

©김호경

어머니의 죽음은 ‘슬픔’과 동의어인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돈을 벌기 위해 마을을 떠났다. 25년 뒤 부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누이는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남자는 어머니와 누이를 놀래 주려고 아내와 아이를 다른 곳에 머무르게 한 뒤 혼자 어머니의 여관으로 갔다. 어머니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남자는 장난삼아 객실 하나를 잡고는 돈을 보여줬다. 밤중에 어머니와 누이는 돈을 훔치려 남자를 망치로 때려죽인 후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다음 날 아내가 여관으로 찾아가 어젯밤 여행객의 신분을 밝혔다. 어머니는 목을 맸고, 누이는 우물에 몸을 던졌다.

뫼르소는 이 신문기사를 수천 번이나 읽었다. 침대 판자 사이에서 우연히 찾아낸 오래된 신문 조각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은 것이었다. 설마 수천 번씩이나? 라는 의아함이 든다. 그러나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것처럼 감옥에 갇힌 사람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 그래서 앤디 듀플레인은 16년 동안 감옥 벽을 파서 마침내 탈옥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탈옥은 꿈도 꾸지 못한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 ‘매우 단순한 사건’이라고 변호사와 판사에게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문제는 젖혀두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관해서만 자꾸 질문을 퍼부어댔다.

“어머님께서 최근 양로원에서 돌아가셨죠?”
“수사관들의 조사에 의하면 ‘냉담해 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마음이 아팠는가?”

뫼르소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도 못한다. 태양이 따갑게 내리쬐는 해변에서 권총으로 아랍인을 쏜 뒤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4발을 더 쏜 것에 대한 행위보다 어머니의 장례식날 눈물을 보이지 않은 것에 더 문제를 삼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슬퍼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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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는 궤변에 불과하다

<이방인>은 소설이라기보다 전반부는 기행문 같고, 후반부는 보고서 같다. 우리는 보통 프랑스어는 영어나 스페인어보다 더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문학적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카뮈는 노벨문학상 작가이기 때문에 제목마저도 멋진 <이방인>은 무척 품격있고 낭만적일 것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계적인 묘사, 순서에 따른 설명, 사물과 사건에 대한 열거가 마치 가전제품의 사용설명서를 읽는 기분이다.

그러함에도 이 작품이 세계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공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우고, 담배를 입에 물고 날카롭게 응시하는 카뮈(Albert Camus)의 눈동자에 짙은 우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제임스 딘을 떠올리게 한다.

평론가들은 ‘부조리’라 말한다. 그래서 다들 ‘카뮈=부조리’이고 ‘이방인=부조리’라 덩달아 말한다. 솔직히 나는 무엇이 부조리인지 모르겠다. 뫼르소는 돈벌이가 시원찮아 엄마를 양로원에 보냈을 뿐이고,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해 장례를 치렀을 뿐이고,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어서 양로원 수위와 함께 한 대 피웠을 뿐이고(흡연자는 이 욕구를 잘 알리라), 수위가 카페오레를 권하자 한 잔 마셨을 뿐이었다.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도 특별할 것은 없다. 현대인이 일상에서 겪고, 치르고, 해치우고, 처리하는 일들뿐이다. 단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특별하기는 하다. 재판장이 “살인에 이르게 된 동기를 밝혀주면 좋겠다”라고 요구하자 “태양 때문이었다”고 대답한 것이다. 해변의 햇빛이 너무 눈부셔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그 행위를 ‘부조리(不條理)’라 칭했다. 그렇다면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면 조리(條理)인가?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이면 정당한 행위인가?

©김호경

특별한 경험에의 유혹

부조리는 평론가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카뮈는 한 청년의 인생행로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 부고를 받은 이후부터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전날까지 그가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를 건조한 보고서 형식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어쩌면 부조리 같은 단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이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논평은 그야말로 부조리하다. 뫼르소는 감옥에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안에서 차올랐다,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행복했고, 또 행복하구나.

그래서 주인공은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한다”고 말들 한다. 내일이면 나의 목에 밧줄이 걸리는데(혹은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는데) 도대체 행복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뫼르소는 행복이 아닌 ‘기대’를 안고 있다. 새로운 경험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질 기대에 부풀어 있다. 사형집행일에 많은 관중이 몰려와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이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특별한 경험일 것이었다(절대 행복이 아니다). 뫼르소는 그 경험을 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번쯤 이방인이 된 씁쓸한 기억이 있다. 혹은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거나.

* 더 알아두기

1. 영화 <쇼생크 탈출>은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모태로 만들어졌다.

2. 까뮈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작품은 아서 퀴슬러와 함께 집필한 에세이 <단두대에 관한 성찰>이다.

사형 집행이라는 의식이 그것을 보는 자로 하여금 결국은 그의 속을 뒤집어 토하게 만드는 것 외에 달리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만적인 제도가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여론의 무심 혹은 무지 때문이다. 여론이라는 것은 주입받은 판에 박은 말로써 반응하는 것이 고작이다. 상상력이 잠을 자게 되면 언어는 의미를 상실한다.

3. <페스트>(La Peste)는 장편소설이다. 오랑이라는 도시에 흑사병(黑死病)이 번지고 의사 뤼가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4. 동시대의 철학가이자 작가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와 친분을 유지했는데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최초로 거부한 사람은 1958년,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를 쓴 소련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이다.

5. 사르트르의 작품은 <구토>(La nausée)가 가장 유명하다. 장편 <자유에의 길>이 있는데 상당히 어렵다.

6. 프랑스 소설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 스탕달의 <적과 흑>,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등이 필독서이다. 누구나 들어보았을 제롬과 알리사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노트>(<티보가의 사람들> 8부작 중에서 1부) 역시 명작이다. 이 책은 청소년(성장) 소설로 분류할 수 있지만 1부 이후로는 두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진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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