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왜’라는 질문으로 찾는 천마도와 고분의 이해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화재 중 고분이 있다. ‘고분(古墳)’은 옛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묻힌 무덤으로, 당시 사회와 문화, 피장자의 지위 등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지표유물이다. 한때 수학여행 필수코스였던 경주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백제의 대표적인 왕릉인 ‘무령왕릉’ 등을 통해 기록이 부족한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남해왕과 유리왕, 파사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경주 오릉’ ©김희태

하지만 대부분 고분을 접할 때 단순히 덩치를 보고 판단하거나, ‘금관’이나 ‘천마도’ 등의 시각적으로 보이는 부분에만 관심을 보이는 경우를 접할 수 있다. 이러다보니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가 어디에 그려진 그림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벽에 그려지지 않았나요?”라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천마도의 정식 명칭은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인데, 그 위치와 용도는 말안장 아래 길게 늘어뜨려 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재질은 ‘백화수피’로 불리는 자작나무이며 유기물로 만들어진 천마도가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천마총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천마도장니’, 유기물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김희태

여기서 다시 “왜 천마도가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천마도가 발견된 묘제양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천마총은 마립간 시기 신라의 대표적인 고분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적석목곽분이란 무덤 자리에 우선 나무로 목곽을 짜서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한 뒤 그 위에 돌을 쌓고, 봉토를 덮는 방식이다. 따라서 나무가 썩게 되면 그 위에 돌들이 틈을 메우기 때문에 공기가 완전 차단된다. 또한 적석목곽분은 도굴이 쉬운 석실분과 달리 규모가 큰 관계로, 도굴을 피할 수 있었던 점도 천마도가 온전히 남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 결과 1600년이 지났음에도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천마도장니’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천마도’의 상징성은 대중에도 깊이 인식이 되어 발굴조사 된 고분의 이름은 ‘천마총(天馬塚)’으로 이름 붙여졌다.

천마총과 함께 경주 대릉원의 대표적인 고분인 황남대총의 전경 ©김희태

그렇다면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천마총이 위치한 경주 대릉원을 보면 어떤 고분은 ‘총(塚)’으로 불리고, 어떤 고분은 ‘분(墳)’으로 불린다. 또한 범위를 조금 넓혀보면 왕들의 무덤을 ‘능(陵)’으로 부르고 있고, 김유신이나 설총의 예에서 알 수 있는 ‘묘(墓)’라고 불리는 무덤도 있다. 이것은 어떻게 구분이 되는 것일까?

쉽게 설명하면 무덤에 묻힌 피장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여기의 범주는 ‘능’이나 ‘묘’로 불리게 된다. 대개 ‘능’이라고 하면 왕과 왕비, 대비의 무덤을 이야기하고, 그 이외의 신분은 모두 ‘묘’로 불리게 된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선시대에 세자나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 등의 신분을 위한 ‘원(園)’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이건 정말 예외적인 경우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김희태

반면 피장자를 알 수 없는 고분일 경우 대개 ‘분’이나 ‘총’으로 불리게 된다. 발굴되지 않은 고분이나 발굴조사를 통해 특징적인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경우 대개 ‘분’으로 정리된다. 반면 ‘총’의 경우 발굴조사를 통해 왕이나 혹은 귀족 등 지배계급의 무덤일 경우에 붙여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천마도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했으며, 검이 출토되어 ‘검총(劍塚)’, 고구려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청동호우가 출토되어 ‘호우총(壺杅塚)’으로 불리게 된다. 반면 ‘황남대총(皇南大塚)’처럼 황남리에 소재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경우도 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자리한 무령왕릉,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릉으로 확인된 경우로, 만약 묘지석이 없었다면 ‘총’이나 ‘분’으로 불렸을 것이다. ©김희태

한편 ‘무령왕릉’이 발견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경우 총 7개의 고분이 있는데, 무령왕릉에서 묘지석이 출토되지 않았다면, ‘총’이나 송산리 7호분으로 명명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천마도를 통해 ‘왜’라는 질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고분의 명칭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보이는 부분을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그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김희태

 화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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