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앞둔 지난주 신문사 동료와 개최지 음식과 문화를 탐방하는 출장을 다녀왔다. 특집 기사를 위해 사흘 내내 하루 4~5끼의 폭식을 불사하며 정선·평창·강릉의 먹거리를 경험했다. 마지막 날, 올림픽 문화행사의 하나인 강릉솔향수목원의 미디어아트쇼 ‘청산별곡’을 돌아보고 나니 오후 8시가 넘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가장 맛있게 먹은 게 무엇이었는지 하나씩 들어보기로 했다. 동료와 나는 동시에 “대관령한우”라고 외쳤다. 관념적으로야 평창올림픽시장의 메밀부치기(메밀전을 이렇게 부른다)나 정선시장의 곤드레돌솥밥을 드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강원도 토속음식 출장을 와놓고 전국 어디에나 있는 한우라니….

한겨울 평창올림픽시장의 메밀부치기 골목. 메밀전이며 수수부꾸미를 부치는데 한창이다. ©서동철

언젠가 대천해수욕장에 갔을 때다. 수십개 횟집이 줄지어 있는 해변의 먹거리 타운에 치킨집이 하나 끼어있는 것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메뉴라 장사가 될까 싶었지만 횟집주인은 치킨집이 훨씬 더 손님들로 북적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일치기로 바닷가를 찾는 사람은 횟집을 찾지만, 이틀만 머물러도 해산물 아닌 다른 음식에 눈이 가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쇠고기를 말한 것도 이런 심리가 아니었을까.

요즘 한우가 맛있다는 고장을 짚어보면, 대부분 전통시대 풍요로운 음식문화를 누렸던 지역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한우가 유명한 모든 고장이 그런 것도 아니고 강원도 토속음식의 메카라고 해도 좋을 평창은 더더욱 예외다. 하지만 한우로 명성을 날리는 태백산맥 서쪽 산록의 몇몇 고장을 떠올리면 “과거에는 크게 내세울만한 음식문화는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농경사회에서 쇠고기를 먹는 문화가 발달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좁은 농경지로 많은 인구를 부양해야 한다. 소는 논밭을 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소를 잡아먹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살행위가 아닐 수 없다.

마빈 해리스라는 미국의 인류학자는 불교의 발생을 쇠고기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인도의 인구는 불교가 태동할 언저리에 이미 포화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힌두교의 원류인 베다교 사제들은 쇠고기를 즐겨먹었고, 농사에 필수적인 소를 종교적 의식에 필요한 제물이라는 이름으로 바칠 수 밖에 없었던 농민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결국 베다교에 대한 반발로 살생을 금지하는, 즉 소를 먹지 못하게 하는 종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불교도 이렇게 태어난 다양한 종교의 하나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인도의 자이나교 승려들은 커다란 빗자루를 차고다니며, 발걸음을 옮길 자리를 쓸고 다닌다. 혹시 벌레 한 마리라도 밟혀 죽지 않도록 하는 배려인데, 살생을 금지하는 교리가 극단화한 사례다. 이렇듯 새로운 종교들이 농민의 마음을 파고들자 베다교는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넘어 아예 소를 숭배하는 전략을 펼 수 밖에 없었다고 해리스는 설명한다.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장 입구에 있는 대관령한우타운의 고기굽기. ©서동철

당연히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는 즉위교서에서부터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은 마땅히 금령(禁令)이 있어야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서 즉위한 정종도 “소는 밭을 갈므로 사람에게 공이 있다”면서 “이제부터는 모든 관청에서 엄하게 도살을 금단(禁斷)하여, 어기는 자는 엄격하게 다스리라”고 했다. 세종은 “소나 말을 도살한 자를 고발하여 체포하게 한 자에게는 범죄자의 재산에서 저화(楮貨) 200장을 상금으로 주도록 하고, 나머지는 몰수하게 할 것”이라고 형조에서 건의하자 그대로 따르도록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럼에도 한번 맛본 쇠고기는 끊을 수가 없었고, 권세 있는 양반들은 더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쇠고기 금령(禁令)도 상당 부분 느슨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성균관에 딸려 있던 반인(泮人)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소의 도살과 판매를 조정으로부터 독점적으로 보장받기까지 한다. 노역을 제공하는 댓가를 주어야 하지만 정부 재정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인들이 쇠고리를 매달아 놓고 파는 가게, 이른바 현방(懸房)은 가장 많을 때는 48곳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기굽는 냄새가 담장을 쉽게 넘지 않는 대궐 같은 저택에 사는 고관대작이야 마음대로 집에서 쇠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었겠지만, 선비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집도 작은데다, 말은 도학자(道學者)처럼 하는 선비들이 정부의 금령을 어기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19세기 화가로 알려진 성협의 ‘야연’(野宴). 산중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는 장면을 그린 풍속화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양반들이 삼삼오오 산에 올라가 쇠고기를 구워먹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여러장 남아있다. 연암 박지원도 ‘만휴당기(晩休堂記)’에서 ‘눈 내리는 어느 날, 화로를 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난로회(煖爐會)를 한 적이 있다. 이것을 철립(鐵笠)이라고 부른다’고 회상했다.

연암은 철립이라 했지만 우리말로는 벙거짓골이다. 벙거지처럼 생긴 불고기판을 이른다. 이런 모습을 두고 조선시대에도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맛을 알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쇠고기를 구워먹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설렁탕에 생각이 미친다. 쇠고기의 역사를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설렁탕의 발생과정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렁탕집에 가면 임금이 선농제(先農祭)에 갔을 때 먹은 음식이 설렁탕이라고 적어놓은 곳이 많다. 하지만 선농제란 농업국가의 국왕이 봄에 직접 농사짓는 모습을 보이며 천지신명에게 한해 농사가 잘되도록 기원하는 의례다. 이런 자리라면 소에게 특별하게 만든 맛있는 여물을 먹여도 시원치 않다. 신성한 소를 때려잡아 가마솥에 고아 나눠 먹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쇠고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은 전통음식을 이어온 강원도 분들에게 송구스럽기 때문이다. 사실 메밀전, 수수부꾸미, 감자전, 감자떡, 올챙이국수, 곤드레밥같은 ‘올림픽 개최지 음식’을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메밀전이라도 마블링 좋은 쇠고기와 비교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아닐까 싶다. 서로 체급이 다른 선수들을 같은 링에 세운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개인적 견해다. 결국 나와 동료는 ‘대관령 한우를 제외하고’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을 꼽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후회해 본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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