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수선화·백서향 향(香) 봄 재촉하네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수십 년 만의 강추위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단 말이 빈말이 아닌 듯 싶습니다. 2월 중순, 예년 같으면 여기저기서 복수초가 황금색 꽃을 피웠느니,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느니 요란을 떨 시기이건만 올해는 아직 잠잠합니다. 입춘(立春)이 지났지만 봄은 아직 멀리 있는 듯합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록적인 폭설과 강추위로 항공기 운항이 일시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동시에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란 명성답게 뭍보다는 두어 발 빠른 화신(花信)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미 작년 12월 겨울의 문턱에서부터 피기 시작해 제주의 겨울을 붉게 수놓는 동백과 여기저기서 밭떼기로 피어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유채, 그리고 매화와 갯국, 광대나물, 개별꽃, 큰개불알풀 등등.

그중 겨울에 피어나 그윽한 향을 풍기며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에 꽃향기가 가득하니 어서 와서 함께 즐기시라”며 손을 내미는 제주만의 특별한 야생화가 있습니다. 바로 수선화와 백서향입니다. 이 둘은 새해 ‘들꽃여행 1번지’로 제주를 찾는 게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해변에 핀 수선화. 왼쪽에는 산방산이, 가운데 멀리로는 눈 덮인 한라산이, 오른쪽에는 용머리 해변과 짙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에 뿌리내렸다.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학명은 Narcissus tazetta var. chinensis Roem. ©김인철

이미 160여 년 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정월 그믐에서 2월 초 피기 시작한 수선화는 3월이 되면 산과 들, 밭두둑에 흰 구름이 깔린 듯, 흰 눈이 장대하게 쌓인 듯”하다며 “마을마다 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다. (제주의)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라고 격찬한 바 있습니다.

추사가 사랑한 제주 몰마농꽃. 꽃대 하나에 꽃이 여러 송이 달리고, 속 꽃잎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게 금잔옥대라 불리는 지중해 연안 원산의 수선화와 형태가 크게 다르다. ©김인철

제주 전역에서 피는데, 특히 추사가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서귀포시 대정 들녘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자생지가 특별히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변은 물론 밭둑이나 돌담 아래, 바닷가 언덕 등지에 흔히 자랍니다.

추사가 유배 생활을 했던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한 도로변에 잡초처럼 피어난 수선화. 추사가 이 수선화를 보며 작으나마 마음의 위안을 찾았다고 한다. ©김인철

제주도에 피는 수선화는 두 종입니다. 하나는 꽃이 크고(몰) 속 꽃잎이 마늘(마농) 뿌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제주 토속어로 ‘몰마농꽃’이라고 불리는 수선화입니다. 또 다른 수선화는 흰색 꽃받침 위에 황금색 부화관(副花冠)이 동그랗게 자리한 게 마치 흰 쟁반(옥대)에 금잔이 앉은 것 같다고 해서 금잔옥대(金盞玉臺)라 불리는 것입니다. 황금색 부화관은 물론 꽃받침 잎까지 온통 노란색인 원예종 수선화도 종종 눈에 띕니다. 추사는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가지가 많게는 10여 송이에 화피 갈래 조각이 8~9개에 이른다”는 설명과 함께 노란색 부화관과 속 꽃잎이 여럿으로 갈라지는 그림을 남겨 당시 제주도에 자생하던 수선화가 몰마농꽃이었음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순백의 겨울꽃’ 백서향. 그윽한 향기가 “봄이여 어서 오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팥꽃나무과의 상록 활엽 관목으로, 학명은 Daphne kiusiana Miq. ©김인철

민가 주변에 피는 수선화와 달리 백서향(白瑞香)은 제주만의 독특한 지형인 곶자왈에서 자랍니다. 숲과 자갈을 뜻하는 제주 토속어 ‘곶’과 ‘자왈’이 합쳐진 곶자왈은 용암이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요철(凹凸) 지형으로, 남방계 식물과 북방계 식물, 콩짜개덩굴 등 양치류 등이 공존하는 원시림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중 백서향은 1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제주의 봄을 재촉하는 꽃으로, 제주의 봄은 곶자왈에 번지는 그윽한 백서향의 향기로부터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김인철

꽃은 키 1m 안팎의 늘 푸른 활엽 관목 가지 끝에 다닥다닥 달리는데, 애초 자주색 꽃이 피고 상서로운 향기가 난다는 중국 원산의 서향(瑞香)에 비해 흰색 꽃이 핀다고 해서 백서향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백서향은 우리나라 남해안과 제주, 그리고 일본에도 자생하는데 최근 제주에서 자라는 백서향은 ‘제주백서향’(Daphne jejudoensis M. Kim)이란 별도의 종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제주백서향은 꽃받침통과 열편(꽃잎이 펼쳐진 부분)에 털이 없고 긴 타원형 잎을 가지며 제주도의 중산간 지역에서 자생하는 반면, 백서향은 꽃받침 통과 열편에 털이 있고 도피침형 잎을 가지며 남해 해안에서 자란다는 점에서 두 종이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지요. 2013년 우리나라 식물분류학회지에 실린 이 주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면 제주백서향은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이 됩니다.

백서향이 한겨울 꽃송이를 가득 달고 곶자왈 숲에 서 있다. 꽃은 3월까지 긴 기간 피어 진한 향기가 곶자왈 숲에 가득 번진다. ©김인철

하나의 가지 끝에 수십 송이씩 달리는 제주백서향은 보통 1월 중순 한두 송이 피기 시작해 만개하기까지 한 달 넘게 소요됩니다. 이 때문에 백서향이 자생하는 제주 곶자왈은 2월에서 3월까지 긴 기간 찾는 이의 오감을 행복하게 하는 힐링의 숲이 되고 있습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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