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의 글로 보다]

[오피니언타임스=김동진] 얼마 전 30년 가까이 선수들을 상습 성폭행, 성추행한 전 미국체조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가 징역 175년형을 선고받은 일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이제 살아서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30년에 이르는 긴 범죄기간이나 피해자 수, 주치의라는 권력으로 어린 선수들에게 성폭력을 휘두른 점 등으로 볼 때 중형 선고는 당연한 결과겠지만 175년이란 숫자는 놀랍고 새로웠다.

반면 우리 재판부는 8살 여자아이를 납치, 성폭행하여 성기와 항문기능의 80%를 손상시키고 평생 인공항문을 달고 사는 고통을 준 조두순에게 고작 12년형을 선고했다. 나이가 많고 술에 취한 심신미약의 상태였다는 이유에서다. 조두순 사건뿐만 아니라 유독 남성에 의한 성범죄 사건의 처벌이 비교적 관대하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픽사베이

“가해자가 술에 취해있었고, 피해자가 모텔에 따라 들어왔고,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지 않았고, 가해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의대에 다니고 있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

성범죄 사건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감형 사유들이다.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져 운전대를 잡으면 현장에서 바로 긴급 체포되어 고액의 벌금형을 받거나 상습인 경우에는 법정 구속된다. 하지만 술에 취해 성범죄를 저지르면 감형 사유가 된다. 많은 남자들이 착각하지만 피해자가 모텔에 따라 들어왔거나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지 않았더라도 상대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모두 성폭행이다.

여러 나라에서 성폭행 상황에서 격렬한 저항은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상대를 자극하는 저항은 자제하라고 가르친다. 자칫하다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대생의 미래를 걱정하는 감형사유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다 큰 성인이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저지른 범죄까지 걱정하고 감형해줄 정도로 법이 그렇게 관대한가. 의대생이든 사법고시 합격자든 죄를 저질렀으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이 상식적이다. 마지막으로 판사 앞에서 깊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말할 가해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재판과정 뿐만 아니라 수사과정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피해자를 조사하며 성폭행 당시 상황을 마치 음란소설 속 한 장면처럼 구체적으로 묘사시키는 수사관도 있다. 피해자의 옷차림을 문제 삼기도 한다. 어떤 여성이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하더라도 강제로 성관계를 맺으면 그것은 강간이다.

재판이나 수사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남성주의적인 시각과 그로 인해 남성 가해자에게 유독 온정적인 판결이 많은 것은 대부분 남성 판사나 수사관들이 그들의 욕망과 속성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남성의 성욕은 평소보다 더 커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여자들의 거절은 본 마음이 아니라 내숭이며, 모텔까지 따라 들어왔으면 피해자도 성관계를 맺을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정상참작이라는 잘못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인 여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여성들이 버스나 지하철 등에서 얼마나 일상적인 성추행을 당하고, 택시 안에서 기사의 성적인 농담에 얼마나 가슴 철렁해하는지, 남자들은 당연히 카드로 결제하는 택시요금을 왜 여자들은 현금을 내려하는지 많은 남자들이 모른다. 공중화장실 이용할 때마다 여기 어디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마음을 남자들은 모른다. 심지어 생리는 참았다가 집에 가서 하면 되지 뭐하러 생리컵 같은 불순한(?) 물건을 성기에 집어넣는지 모르겠다는 댓글도 본 적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물론 남자들이 여자들의 마음과 속성을 100%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공정한 판결을 내릴 의무가 있는 판사들은 여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련 책을 읽고 피해여성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정도의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 남자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만큼 여자들의 세계도 이해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이 앞으로 나올 것이다. 

김동진

한때 배고픈 영화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들 독서수업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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