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따뜻한 생각]

[오피니언타임스=김연수] 늦은 저녁 집으로 오는 길에 아빠를 봤다. 집 앞에 주차된 차 안에서였다. 아빠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운전석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굳이 집밖에 나와 차 안에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묻고 싶었지만 창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내가 말을 걸면 아빠의 공간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잠시 동안 창문 너머 아빠를 들여다보았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흔한 라디오 노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 어쩌면 낮은 클래식 음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클래식을 좋아했지만 동생과 내가 있을 때는 최신 가요를 틀곤 했으니 말이다. 쉽게 지루해하는 우리를 아빠는 나름대로 배려해왔다. 조수석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책과 가구 관련 잡지가 몇 권 놓여 있었다. 내가 아빠를 관찰할 동안 아빠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잠이 들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경직된 자세였다.

아빠를 뒤로 한 채 홀로 집에 들어왔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생각했다. 내가 없는 사이 부부싸움을 해서 아빠가 엄마를 피해 집밖으로 나온 게 아닐까. 어린 시절에도 아빠는 종종 엄마와 싸우면 내 손을 잡고 나와 산책을 하곤 했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자 내 추측이 보기 좋게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안에는 동생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아직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아빠가 따듯하고 편안한 집을 나올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일상적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 내내 머릿속은 ‘왜’라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얼굴이 아니라 편안한 표정이었던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 아빠는 무언가를 피해서 차로 간 게 아니라 원해서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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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종영된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서>에는 ‘19호실’이 등장한다. 19호실은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완벽하게 누구에게도 공개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공간을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배우자와 자녀조차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완전히 독립된 영역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은 외도를 한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19호실’을 지켜내려고 한다. 여주인공은 한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지만 자신만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렇게 다락방에 어머니의 방, 다시 말해 19호실이 생기지만 머지않아 아이들이 출입하게 되면서 온전한 19호실이 되지 못한다. 그로인해 그녀는 남편 몰래 집에서 떨어진 싸구려 호텔 방 하나를 잡고 그곳에서 몇 시간씩 머물곤 한다. 불규칙적이지만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느낄 때 19호실을 찾는 것이다.

1주일에 한 번, 혹은 하루에 한 번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19호실에 머무는 일은 계속된다. 하지만 19호실을 끝내 남편에게 들키고 마는데 이때 여주인공은 외도를 하고 있다는 엄청난 거짓말을 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처음에는 여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거짓말을 할 만큼 19호실을 지키는 게 중요한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날 때쯤에는 모두들 19호실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아무도 없는 차 안은 아빠의 19호실이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란 존재가 사라지는 느낌은 해가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강해진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김연수, 누군가의 딸이었다면 시간이 지나 가정이 아닌 어딘가에 소속되고 생활을 하며 또 다른 ‘나’는 거듭해서 생겨났다. 누군가의 누나, 언니, 친구, 제자, 멘토, 연인 등등 현재하고 있는 모든 활동마다 각각의 역할이 새로 부여되고 있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때때로 지치는 순간이 온다. 내가 느꼈다면 아빠는 몇 배는 더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아들, 형, 친구, 아빠, 스승, 제자, 동료 등 아빠를 일컫는 다른 이름들은 너무나 많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차안에 있는 아빠에게 말 걸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다. 아빠의 19호실을 지켜주었다는 뿌듯함도 밀려왔다.

24시간 중 온전히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많지 않다. 오히려 24분도 나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을 때도 있다. 빨리 모든 걸 해내고 앞서 나가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러니 모두들 차근차근 자신만의 19호실을 찾길 바란다. 아무도 접촉할 수 없는 비밀스런 공간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방해받지 않고 한숨 돌릴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 

김연수

제 그림자의 키가 작았던 날들을 기억하려 글을 씁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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