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_ 왜 지금 변시지인가1

지금까지 ‘폭풍의 화가, 변시지’ 시리즈 연재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림으로 들어가기를 체험했을 겁니다.
그럼, 이제는 그림 속 남자 자신인 폭풍의 화가에게 본격적으로 들어가 볼까요?
먼저 그의 외로움이 그의 인생에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보겠습니다.

©변시지, 클릭하면 확대된 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화가도 인간이죠. 인간적으로만 보면 화가는 보통의 우리보다 훨씬 괴롭고 외로운 삶을 산 사람입니다. 나라를 뺏긴 채 살던 1926년 태어나, 그림 시작은 동네 서당에서 처음 붓을 가지고 했습니다. 6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형을 따라 제주도 서홍동 고향을 떠나 일본 오사카로 갔습니다. 일본인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죠센징으로 무시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뜨거웠던 화가는 초등학교 일본 아이들과의 씨름 시합을 하다가 부당한 경기로 다리를 다쳐 평생 불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우려했던 일이 끝내 터진 거죠. 화가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위로하려고 사준 화구에 기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도쿄에 가서는 일본 인상파를 주도한 광풍회 화단에 어렵게 들어가서 소수인으로 질시와 견제를 버텨야 했죠. 처음에 그의 그림은 많은 무시를 당했습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그의 그림을 왜 인정하지 않느냐고 하자 “그를 인정하면 우리가 모두 부정 당한다”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 옵니다. 그 견제를 뚫고 어린 나이에 최고의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이 그는 아니었습니다.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되었지만 어눌한 한국말 또 교단과 화단에 만연한 텃세에 힘들어했습니다.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일본에서 왜 왔느냐는 정보기관 기관원의 검열도 늘 따라붙었다고 합니다. 결혼한 날이 마침 4.19였는데 이때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고 합니다.

화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한국 고궁을 찾아 극 사실주의로 전향했다가 마침내 나이 51세에 고향 제주도로 돌아갔습니다. 가족을 떠나 타히티로 떠난 폴 고갱의 그림 여정이 생각나는 삶입니다.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몸은 늘 아팠다고 합니다. 다리에서 농이 흘러 내리는 것은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일주일간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신 적도 있었고 제자나 지인들에게 실려서 집으로 간 일은 비일비재. 폭풍이 치는 날, 자살 바위를 서성거리기도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황색을 찾습니다. 황색을 찾은 설은 두 가지가 전해지는데 하나는 제주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보다가 발견한 황토 빛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술에 취해 어질어질해진 눈에 장판 색깔 같은 황토 빛이 보이면서 “마침내 형과 색을 찾았다” 유레카 탄성을 터트렸다는 설이 그것들입니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통해 화가는 그만의 예술과 풍토 화풍을 찾습니다. 말년에는 추사 풍의 한국 문인화와 동양적 자연 심경을 연구했습니다. 결과 그는 극도로 단순해지면서 묵(墨)색 그림의 경지로 들어갑니다.

화가는 말년에 두 개의 상반된 메시지를 냅니다. “나를 따르지 마라”와 “나는 내 그림이 여러분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 겁니다. 젊어서 얻은 화려한 명성과 섬 안에 스스로를 가둔 고독, 한국인의 정체성과 예술의 보편성, 보편적 예술과 독특한 풍토 그 사이에서 말년까지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삶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피니언타임스=변시지 화가, 황인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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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은 변시지 그림을 소유한 시지아트재단과 황인선 작가와 협의 후 게재하는 것입니다. 본문 안에 포함된 사진을 따로 퍼가거나 임의로 사용할 경우 저작권법에 저촉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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