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영빈 이씨의 묘가 ‘수길원’을 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조선시대는 신분질서에 대한 관념이 명확했는데, ‘사농공상(士農工商)’을 통해 선비와 농민, 장인과 상민의 계급질서가 만들어졌다. 당시 국가의 기반 산업이 농업인 관계로 농민의 신분이 공업이나 상업 종사자보다 높았다는 점은 이색적이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신분질서는 사람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 아내의 경우도 남편의 신분질서에 따라 신분이 똑같이 적용됐다.

한 예로 외명부의 품계 중 정 1품과 종 1품에 해당하는 품계가 정경부인이다. 과거 한 대중매체에서 정난정이 극 중 자신을 정경부인의 신분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정난정의 남편인 윤원형이 정 1품의 정승급 관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분에 해당되는 되는 사람이 거주하는 건축물이나 무덤 등에도 격에 맞도록 조성이 되었는데, 건축물의 격에 따라 “전(殿)-당(堂)-합(閤)-각(閣)-재(齋)-헌(軒)-루(樓)-정(亭)”으로 불리고, 무덤 역시 “능(陵)-원(園)-묘(墓)”에 따라 신분질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조의 건릉, 무덤의 신분질서 중 가장 최상위에 있는 능의 묘제로, 조선왕릉은 42기가 남아있다. ©김희태

무덤의 신분질서 중 가장 최상위에 있는 것은 ‘능’으로, 대개 왕과 왕비, 대비의 신분을 가진 무덤을 칭할 때 부른다. 이러한 왕릉의 조성은 후임 왕의 중요한 국책사업이자, 정통성의 계승을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포함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이전에는 능을 제외하면 그 이외의 무덤을 모두 ‘묘’라고 칭했는데, 조선 중기에 들어서며 능과 묘 사이에 새로운 묘제를 하나 만들게 된다. 이것이 ‘원’으로, 세자와 세자빈, 후궁이지만 왕을 낳은 어머니 등에 한정해서 조성되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라는 점에서 격에 맞지 않는 이가 상위의 무덤 양식을 쓸 경우 조정의 반발을 불러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원빈 홍씨의 ‘인명원(仁明園)’이다.

서삼릉 내 비공개 지역에 자리한 원빈 홍씨의 ‘원빈묘’, 한때 ‘인명원’으로 불렸지만, 조정의 반발 끝에 ‘원빈묘’로 격하되었다. ©김희태

원빈 홍씨는 홍국영의 누이동생으로, 조선 역사상 최초로 빈으로 간택되어 정조의 후궁이 된 경우였다. 이는 홍국영이라는 권력자의 힘이 작용을 한 경우였는데, 원빈 홍씨의 경우 궁궐에 들어온 지 1년 뒤인 1779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연히 후궁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무덤 양식은 묘라 칭하는 것이 맞지만, 당시 권력자인 홍국영에 의해 원빈 홍씨는 인명원으로 한 단계 격이 높여진 채 지금의 고려대학교가 소재한 안암동에 조성되었다.

하지만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인명원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되는데, ‘정술조’를 비롯해 조정에서는 인명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가 그치지 않았다. 당시 순회세자와 소현세자도 묘를 칭하는데, 일개 후궁의 묘를 원으로 칭한 예는 없다는 점을 주장했다. 인명원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자 처음에 난색을 표하던 정조도 그 의견을 받아들여 인명원을 원빈묘로 격하시키고, 묘제에 맞지 않는 건물과 석물의 훼철을 지시했다. 이후 1950년 서삼릉 내 빈과 귀인의 묘역으로 이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정빈 이씨의 ‘수길원’, 본래 ‘정빈묘’로 조성이 되었지만 훗날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이 된 정조가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한 까닭에 원을 칭할 수 있었다. ©김희태

반면 ‘수길원(綏吉園)’의 사례는 인명원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수길원은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원역으로, 영조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효장세자는 10살의 나이로 요절을 했고, 정빈 이씨 역시 효장세자를 낳은 지 2년 뒤인 1721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따라서 신분질서를 따지면 묘로 조성이 되어야 하는데, 수길원이라 이름 붙여진 건 앞선 인명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앞뒤가 맞지 않다. 영빈 이씨의 묘는 어떻게 수길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이 있었던 임오화변(1762)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의 ‘영릉(永陵)’, 이처럼 한 글자의 차이에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해당 문화재의 의미와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희태

당시 사도세자는 죄인의 신분으로 죽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원손인 정조는 정통성에 문제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아버지였던 영조는 원손인 정조를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을 하는 조치를 취했다. 즉 생부는 사도세자이지만, 법적인 아버지는 효장세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정조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효장세자를 진종(眞宗, 1719~1728)으로 추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빈 이씨의 신분 역시 기존의 후궁에서 왕을 낳은 후궁으로 변화하게 되고, 신분질서의 격에 따라 원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화재에도 신분질서가 고스란히 투영된 점은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주제다. 따라서 단순히 문화재의 외형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문화재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함께 이해한다면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김희태

 화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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