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_ 왜 지금 변시지인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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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시지와 고갱의 연결을 보기 전에 인상파에 대해서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고 가겠습니다.

먼저 프랑스 살롱문화부터. 살롱(Salon)은 보통 근세에서 근대에 걸친 프랑스 상층계급 저택의 응접실을 말합니다. 17~19세기에는 문학, 예술, 정치, 사상, 과학, 풍속 등의 여러 가지 면에서 자극을 준 회화나 담화의 장소가 되고 주재하는 부인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문화사적인 중요성을 갖는 곳입니다. 미술용어로서는 현존하는 예술가의 작품을 모아서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공식의 전람회를 뜻합니다.

루이 14세에 아카데미의 설치로 시작되어 제1회 살롱전은 1667년에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1751년 이후부터 2년마다 열리게 되었는데 최초에는 아카데미 회원 및 그 관계자에 한정되어서 루브르 궁의 ‘살롱카레’ 에서 열렸었기 때문에 ‘살롱’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통적 살롱문화에 반란을 일으킨 화가들이 인상파들입니다. 1873년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던 살롱이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세잔느 등의 그림 전시를 거부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사진작가 나다르의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앙데팡당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출품자 중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인용하여, 신문기자 르로이가 이들 모두를 ‘인상주의자’라고 조소적인 의미로 부른 것이 시초입니다.

이들은 대체로 아카데미즘과 낭만주의 이념에 반대하여 자연 혹은 삶의 조각들을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정신에 의해 기록하는 사실주의의 태도에 동조했습니다. 인상주의의 시대적 배경은 *자포니슴의 만연과 사진기의 발달로 인한 미술의 초상화 기능 쇠퇴, 현대 시민사회 형성과 광학의 발달, 그리고 고전주의 역사화에 대한 반발 등으로 요약됩니다.

인상파는 서구에 나타난 최초의 자연발생적 집단 운동이었지만 예술가마다 화풍과 소재는 아주 다양했습니다. 일본 광풍회를 중심으로 한 인상파 흐름은 서구의 이런 흐름과는 다소 달라서 인상파적 요소가 가미된 사실주의 인물화가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변시지의 도쿄시절 대표작 ‘3인의 나부’, ‘여인’, ‘네모의 상’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그림)’ 등이 그때 작품이었습니다.

©변시지, 클릭하면 확대된 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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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변시지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변시지 그림을 보면 또 하나 떠오르는 사람이 폴 고갱이라 했는데 고갱은 현대회화에서 중요한 표현주의 시대를 연 후기 인상파 화가입니다. 후기 인상파의 출발은 전기 인상파와 달리 눈으로 보는 실제와는 다른 세계, 보이지 않는 감정, 인간의 복잡한 심리, 이미지 등을 묘사하고 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움직이는 광경을 표현하는 고흐, 표현주의 기법을 선도하면서 오염되지 않은 원시적 삶을 묘사한 폴 고갱, 빛이 아니라 형태에 매료된 세잔느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중에서 특히 폴 고갱은 변시지의 제주도 삶과 그림을 이해하는 문이 될 것 같습니다. 변시지는 일본 광풍회(光風會. 光은 인상파의 특징이다.) 회원 시절 인상파 인물화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둘의 출발은 일단은 인상이었던 것이죠.

폴 고갱은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화가입니다. 달은 이상이고 6펜스는 비루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6펜스는 아마도 변시지 그림에서 외족오나 지팡이, 여윈 말 등과 상응하는 상징일 것입니다.

©변시지, 클릭하면 확대된 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폴 고갱은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1848년 파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기자였던 고갱의 어린 시절은 페루의 리마에서 시작되었죠. 아버지가 사망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견습 도선사가 되어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을 여행하였습니다.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서는 증권사 지점 일을 하였습니다. 35세에 증권업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이사를 하였습니다. 화가로 살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결국 가족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고 그곳에서 종래의 인상파 풍을 버리고 차차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토속적인 토기 도자기 제작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토기에서 비롯된 원시적인 관심은 그를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으로 인도합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때 제작된 작품은 원시주의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습니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인상파 자연주의를 벗어나는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황색은 Yellow로서 통상적으로 황제, 영광, 부, 희망을 나타내는 색으로, 변시지의 황토 색과는 다릅니다.

1891년 고갱은 마침내 타히티 섬으로 떠납니다. 타히티는 제주도의 60%정도 크기 섬입니다. 폴리네시아 민족의 중심 거주지로서 독자적인 전통문화를 발전시켰는데 아름다운 열대 풍경과 외래인을 환대하는 주민의 성격에 매료된 유럽인들은 ‘남해의 낙원’ ‘비너스의 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고갱은 타히티와 파리를 오가며 그림과 집필활동을 했고 피카소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지만 삶은 곤궁했습니다. 매독과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작한 그림이 ‘우리는 어디서 와서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변시지의 1982년 그림에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가 있는데 고갱이 원시적이고 종교적인 구원을 다룬 것이라면 변시지는 여성의 성기형태의 산과 자궁을 의미하는 초가집을 배치하여 자궁에서 태어나 고독한 삶을 살다 멀리 조각배를 타고 이어도로 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우주적 연민을 다룬 것 같습니다.

*자포니슴((Japonisme):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예술 전반에서 일본의 영향이 나타나는 현상. 생활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개념이 일본의 미술에 있었는데 서구 미술에서 19세기 말 다양한 예술혁신 운동이 예술의 직인(職人)적 측면을 새롭게 평가하며 이에 일본 예술관이 영향을 미침. 인상파는 일본의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오피니언타임스=변시지 화가, 황인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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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은 변시지 그림을 소유한 시지아트재단과 황인선 작가와 협의 후 게재하는 것입니다. 본문 안에 포함된 사진을 따로 퍼가거나 임의로 사용할 경우 저작권법에 저촉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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