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_ 왜 지금 변시지인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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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시지를 이해하는 마지막 고리로 그의 그림과 1980년대 후반 한 기업의 캠페인을 연결시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시기는 변시지 화가가 제주 사범대에서 은퇴하기 직전입니다.

그림을 말하고 치유를 말하는데 웬 기업 캠페인이냐고 의아해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캠페인은 시대를 치유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분들이라면 도브 비누가 했던 유명한 ‘리얼 뷰티’ 캠페인을 아실 겁니다.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으라는 이 캠페인은 많은 세계 여성들의 자존심을 치유해줬습니다. 인텔 인사이드 광고를 했던 인텔이 시도한 ‘뷰티 인사이드’ 드라마 광고 역시 사람들을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향하게 해줬습니다.

도브는 ‘리얼뷰티 캠페인’을 통해 미용브랜드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고발하고, “평범한 아름다움”이라는 그들만의 가치를 강조했다. 클릭하면 영상으로 연결됩니다. ©유튜브

이 평론 제목이 ‘왜 지금 변시지인가를 주제로 하고 부제를 ‘폭풍에 흔들리는 현대를 향하여’라고 했는데 지금 한국의 상황은 하늘은 누렇고 태양은 늘어졌으며 폭풍이 불어닥치는 변시지의 그림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경기는 황달 상태고 리더십은 늘어졌으며 일자리는 줄고 기업들이 파산하고 있습니다. 노령화와 자살률이 치솟고 인구절벽도 코앞에 닥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 때문에 국민적 허탈감이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최씨 사건만 빼면 유독 한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유럽의 PIGS 국가를 거론할 것도 없이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미국도 그런 시기가 수 차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 상황은 지금 한국과 많이 비슷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를 돌파하고 나간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1989년 나이키의 ‘저스트 두 잇 캠페인 (Just Do It)’입니다.

지금을 혼족 시대라고 하는데 미국도 이미 이 시대에 혼족 시대가 있었습니다. 조깅을 요즘은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건강 주법 정도로 알고 있지만, 시작은 80년대에 아메리칸 드림이 깨진 믿을 것 없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자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즘 말로 하면 혼주(혼-走. Run Alone)에 다름 아닙니다. 그들은 왜 혼자 달려야 했고 나이키의 저스트 두 잇 요구가 왜 그리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 조금 더 깊게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옥스퍼드대 로레알 마케팅학과 교수인 더글라스 홀트가 <컬트가 되라 Cultural Strategy> 책 내용을 주로 인용한 것입니다.

“1970년대 말부터 미국 경제는 중대한 변혁기에 접어들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난 25년간 미국을 든든하게 지탱해 주었던 이념이 붕괴됐고 이념의 재구성 작업은 1980년대 말에 가서야 비로소 마무리된다…… 경제의 성장 엔진이 멈춤에 따라, 동시에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나날이 발전하던 생활수준이 정체됨에 따라 미국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1970년대 말 가장 개인주의적인 운동인 달리기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조깅은 단순히 주법 운동이 아니었다. 혼란한 양상을 빚었던 새로운 자유경제는 미국인들에게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했다. 소위 ‘극렬 개인주의 (Rugged Individualism. 욕구 충족의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다시 각광받았다. 그러나 이번 극렬 개인주의의 목표는 서부 개척지, 즉 프런티어에서의 삶이 아니었다. 이제는 글로벌 경쟁이라는 사상 초유의 도전에 맞서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사람들의 선언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정신과 신체 모두를 강인함과 엄격함으로 무장해야만 했다.”

이 대목은 2차 대전 후 아메리칸 드림의 꿀맛에 빠져 있던 미국이 1973년 1차, 78년 2차 오일쇼크를 맞고 1975년엔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빠르게 재 성장한 서독과 일본의 침투로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게 되고 그에 따라 국민 심리가 얼어붙는 사회적 파괴 현상을 설명한 글입니다.

나이키 캠페인은 이런 상황에서 외로운 달리기를 해야 하는 러너들의 투쟁적 일상에 초점을 맞춘 ‘솔로 투혼’이란 이념을 제시합니다. 광고 슬로건은 저스트 두 잇. 첫 광고는 80대 노인의 달리기 편이었습니다. 새벽에 신발 끈을 조이는 실직자, 장애인, 게토의 흑인 청년들이 이어서 모델로 등장했습니다. (솔로 투혼과 변시지의 절벽에 선 지팡이 남자를 중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 이 캠페인은 요즘 광고와 SNS상에서 나도는 눈물 짜는 휴먼 스토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이 캠페인 슬로건이 어떤 사형수가 죽음을 앞두고 사형집행인에게 ‘Let's do it’했던 데서 영감을 받은 리얼리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캠페인은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당신 삶의 주인은 바로 당신이니 삶을 온전하게 통제하라.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너무나 쉽게 억압하는 세속적인 어떤 힘에도 절대 굴복하지 마라. 이제는 행동할 시간이다.”

Nike - Just Do It (1988). 클릭하면 영상으로 넘어갑니다. ©유튜브

그러니 자기계발에 나서라고 영감을 주면서 미국을 채찍질했고 미국인은 이 이념에 스스로를 동화시켰습니다.

예술적인 관점은 잠시 제쳐두고 우리 인생에 미치는 위로와 자극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캠페인과 변시지 화가의 그림 메시지가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캠페인 광고에 등장한 은퇴자, 장애인, 게토의 흑인 소년 등이 미래를 포기하지 않듯이 변시지의 그림에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는 남자도 포기한 자가 아닙니다. 비록 폭풍이 불어 닥치고 파도가 덮쳐오더라도 그의 앞에는 올라가야 할 언덕과 절벽이 있고 태양이 여전히 비추고 있습니다. 남자에게는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 물러설 수 없는 우리의 현재 삶처럼.

변시지 <생존>

1991년 그린 작품인 <생존>에는 바위에 고립된 까마귀들을 덮치는 파도와 어두운 밤바다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날 수도 가만있을 수도 없는 상황. 2000년에 열화당 시리즈로 변시지 전기를 쓴 서종택 교수는 이 그림을 두고 “삶의 현실적 정황과 실존적 본질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석하는데 여기에 외로운 시대란 말을 첨가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어두운 밤바다고 넘쳐대는 파도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변시지의 그림이 현재성이 있다는 것이며 또한 제주도를 넘어선다는 것이고 폭풍은 기후로서의 바람이 아니고 세계와 마음의 조응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키는 물러서지 말고 ‘저스트 두 잇’하라고 했던 것이죠.  [오피니언타임스=변시지 화가, 황인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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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은 변시지 그림을 소유한 시지아트재단과 황인선 작가와 협의 후 게재하는 것입니다. 본문 안에 포함된 사진을 따로 퍼가거나 임의로 사용할 경우 저작권법에 저촉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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