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소중한사람]

[오피니언타임스=이수진] 정부가 국정과제로써 반려동물산업육성법(가칭) 제정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6년 7월 7일 발표한 ‘투자활성화 대책’ 가운데 포함된 이 법안은 동물생산 및 유통업을 이른바 ‘신산업’으로 육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유기견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상황에서 반려동물 생산·유통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목소리가 동물단체를 중심으로 커지고 있다.

특히 국가가 운영하는 유기견 보호소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백 마리가 넘는 보호소에 직원은 공무원 두 명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이들은 ‘공무원 신분’이라서 공휴일이나 일과 시간이 끝나면 업무를 보지 않는다. 입양자가 나타나도 서류를 해줄 사람이 없어 입양 업무가 지체되거나, 심지어 보호소 밖에 주인이 개를 찾겠다고 와도 일과가 끝난 시간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 내가 직접 겪은 유기동물 체험기를 전한다. 이 짧은 글이 강아지 농장, 펫샵을 규제하지 않고 오히려 유기견 산업을 육성하는 정부의 정책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 주인에게 돌아간 복순이 ©이수진

왕복 팔차선에서 구조해온 스피츠

동생이 늦은 귀가 길에 패닉 상태로 왕복 팔차선을 종횡무진 하는, 하얀 털이 회색으로 변한 스피츠 한 마리를 구조해 돌아왔다. 복실이(지금 키우는 강아지)가 다니던 병원에 가보니 건강하다고 했고 집에 데려가니 잘 놀고 잘 먹고 잘 잤다. 주인을 찾을 때까지 집에서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견에 대한 절차를 묻는 질문에 다니던 병원 수의사는 유기견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 때부터 스피츠 녀석의 얼굴에 복실이의 얼굴을 겹쳐보았다. 복실이는 내가 모르는 세월동안 유기견으로 살았으니까. 수의사가 주인을 가진 환자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주인 없는 유기견에 대해서는 그 구조자에게 안내해줄 정보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스피츠는 주인에게 무척 사랑받고 자란 것이 틀림없었다. 구름다리를 건넌 우리의 첫 사랑 로디가 생각났다. 로디도 저렇게 성격이 좋았었다. 태어날 때부터 한 주인에게서 사랑받고 자라서, 상처를 몰라서, 사람이면 다 좋아하는 성격, 사람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적 없다는 해맑은 얼굴. 스피츠는 로디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엄마는 스피츠를 좋아했다. 처음 보는 집에 와서 먹다가 놀다가 거실 한 복판에 누워 태평하게 잠드는 성격을 보고 눈물을 찍어내면서 동시에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스피츠는 로디처럼 잠들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내내 떨고 있는 복실이의 눈치를 봐야했다.

스피츠는 착했다. 복실이 근처에서 맴돌았다. 복실이 장난감을 마구 가져가지도 않았고, 그저 같이 놀고 싶다고 주위만 맴돌았다. 복실이에게 이거 같이 가지고 놀자고 하면서 스피츠 녀석에게 던져주면 복실이는 싫다는 표현도 못하고 겁에 질려있었다. 스피츠 녀석은 녀석대로 덥썩 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기다리다가 슬쩍 집어가서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았다. 두 녀석 모두 우리 모두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복실이를 이해해야 했다. 그는 태어난 이래 내내 학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학대로 생긴 다리장애 때문에 같은 개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그의 마음속에는 사람과 개들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스피츠의 등장은 그에게는 친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동료의 등장이 아니라 위협이 되는 것 같았다. 급기야 복실이는 덜덜 떠는 것과 동시에 밥도 안 먹고 구석을 찾아 웅크리기 시작했다.

결국 복실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나가게 된 것이 그날 밤이었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배달음식과 챙겨온 사료를 다른 그릇에 담아 먹는 것으로 끼니를 해결했고, 소파에서 자는 것과 여행용 커넬에서 잠드는 것으로 며칠을 보냈다. 사무실들이 몰려있는 곳이라 문 열고 닫는 소리, 복도에서 나누는 대화 등으로 복실이의 낮과 저녁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눈은 잠을 자는데도 자꾸 흐려졌다. 스피츠를 돌보느라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엄마는 복실이를 걱정하는 전화로 시작해서 스피츠가 얼마나 잘 지내는지 사진을 찍어보내는 것으로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스피츠 녀석을 좋아했다. 할 수만 있다면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연로해지는 부모와 언제든 결혼으로 생활의 변화가 생길 수 있는 나. 혼인을 하고 집을 떠난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강아지는 한 마리였다. 더불어 복실이가 가진 트라우마와 그가 늙어갈 때, 그가 겪게 될 다리상태 등을 고려했을 때, 두 마리를 책임진다는 일에는 자신이 서질 않았다.

나는 이 죄책감을 한 달, 혹은 때때로 내는 보호소에 대한 성금이라는 것으로 대체해오곤 했었다. 그리고 결국 이번에도 같은 길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복순이를 유기견 보호소에 맡기며 작성한 파양동의서 ©이수진

내가 경험한 유기견 산업

인터넷 카페를 도배해봐도, 유기견 사이트에 글을 수차례 갱신해봐도 주인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피츠 녀석을 데려온 지 열흘 정도 지난 무렵이었을까. 동생과 나는 이 곳 저 곳에 전화를 하고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사설 보호소를 찾았다.

왜 공공 보호소나 사설이라도 내가 알고 있는 정말 선한 의지의 분들이 운영하는 보호소를 찾지 않았느냐고? 부끄럽게도 아무리 비용을 지불한다고 해도, 우리가 복순이에게 해주고 싶은 정도의 환경은 찾을 수가 없었다. 불쌍하고 병든 멍멍이들 치료비 십시일반 모금해서 치료해주고, 사료의 질보다는 일단 굶기지 않아야하는 곳에다가 비용을 내겠습니다. 그 대신 이 스피츠만 특별대우 해주세요. 아니. 그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민간에서 운영하는 강아지호텔이나 카페, 아니면 보호소를 표방한 업체들뿐이었다. 심지어 비용이 너무 저렴한 곳은 신뢰가 가질 않았다. 별별 핑계로 내부공개가 되질 않는다든가. 대형견들과 구분조차 되지 않는 장소에서 취침까지 해결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장소들도 있었다. 아니면 개들 숫자에 비해 직원의 수가 말도 안되게 적었다.

동생이 구조했지만 우리가 끝까지 보호할 수 없는 스피츠였다. 내 만족에 불과할지라도,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가 최대한 좋은 환경에서 지내기를 바랐다.

‘비용을 받고 위탁 보호해주는 시설을 찾습니다. 시설이 좋아야하고, 위생적이고 쾌적하며 돌봐주시는 직원 분들이 많은 곳을 찾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원할 때 지내는 상황을 확인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심 끝에 선택한 그곳은 우리 남매가 약속 없이 갑자기 들이 닥쳤는데도 불구하고 깨끗했다, 다른 강아지들 물통도 다 채워져 있고 물도 깨끗하고, 사료포대나 간식 빈 봉투 등을 버린 것을 보니 괜찮은 것을 가져다 먹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상주 직원들이 꽤 있었다. 1견 1실인데 넓었다. 낮에는 한적한 애견 카페에서 놀게 해준다고. 40만원. 입양 후 사진 등의 사후 관리를 원한다면 50만원. 미용 등의 추가적인 관리를 원한다면 다시 10만원 추가.

위생적인 환경이라고, 네가 더 이상 추위 속에 8차선을 왕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밥 굶지 않고, 너를 빗겨주고, 닦아도 준다고, 너와 놀아도 줄 거라고,

나는 환불 안 되는 것에 동의하고, 구조자라도 맡길 때는 파양동의서를 써야 입양을 갈 수 있다. 이름이 일단 있어야 부를 것 아니냐고 해서 그럼 너는 복순이. 복실이가 있으니 우리에게 너는 복순이.

복순이는 제 방이라고 신나게 들어가 놓고는 우리가 너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정말 떠나기 시작했을 때, 고작 10일 만난 게 뭐라고 나를, 동생을, 아니 그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었다. 웃던 얼굴이 사라진 너를, 플라스틱 창에 다가와 붙은 너를 우리는 돌아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학대로 다리를 다친, 힘든 유기견 시절을 겪었던 복실이 ©이수진

모순투성이 민간 유기견 보호소

그 가게에는 모순이 많았다. 첫 번째는 거기에 이렇게 위탁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개들도 있고, 그 위층에는 진열장에서 팔리는 새끼 강아지들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는 사설 유기견 보호소라는 그 가게에 이렇게 구조되어 비용과 함께 위탁 맡겨진 개들은 복순이 말고는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 주인에게 버려진 개들이었다. 그나마 아무데나 유기하는 아주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게 다행이었을까. 버려진지 오래되어 더 이상 짖지 않는 개, 버려진지 얼마 안 되어서 제 주인이 찾으러 왔나하고 짖고 또 짖는 멋진 대형견,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두 눈을 껌벅껌벅하는 까만 눈동자. 우리 집 복실이 같은 시골강아지는 있지도 않았다. 모두 ‘종’이라는 것이 있는 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장난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 주인이 챙겨 준 장난감을 잔뜩 가진 개들. 임신했다는 주인이, 이민 가는 주인이, 이사 가는 주인이, 개와 둘이 오순도순 살다가 부모 집으로 들어간다는 주인이 그냥은 안 버리고 40만원, 50만원, 커다란 개는 60만원, 70만원 주고 여기에다 버려준 개들. 여기서 수년 동안 살고 있다는 노견. 하얗게 눈이 내린 두 눈을 꿈벅 꿈벅, 눈이 영 못 보게 된 다음에야 맡겨졌다는 내 손바닥 두 개만한 노견.

그리고 복순이는 내가 저를 맡긴 다음날 저를 찾아 온 주인을 만나 뛸 듯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무엇보다 안심을 한 것은, 그 주인이 그 위탁한 곳의 문이 열기 전부터 와서 기다렸다는 점이었고, 그 분을 보자마자 복순이가 거의 기절할 정도로 반가워했다는 점이었다.

사연인즉슨, 동생이 복순이를 구조하기 전에 스피츠 구조를 시도했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이분도 구조 장소 근처 동물병원에 이 강아지에 대해 문의를 한 적이 있었고, 내 동생도 구조 즉시 그 동물병원에 혹시 주인의 행방을 물었다. 그 병원과 맨 처음 구조를 시도한 부자는 내가 올리는 게시물을 알고 있었던 연결고리가 있었는데, 인터넷에 친숙하지 않으신 복순이 주인분이 헤매면서 발품을 팔다 그 병원까지 와서 복순이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나에게 이 전말을 알려주신 것이 이 이 멋진 해피엔딩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물론 그래도 주인인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나는 그 위탁점에 여러 번 전화를 해야했다. 맡긴지 하루 만에 주인이 찾아가는 터라 혹시 내가 환불이라도 요구하는 줄 알았는지 전화를 해준다고 해놓고 영 전화가 오질 않았다. 나는 그저 정확하게 진짜 주인인지 알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문자로 환불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불한 비용은 몇 년 째 살고 있다는 그 앞을 보지 못하는 녀석에게 써주면 좋겠다. 혹은 구조되어 들어오는 녀석들한테 써줬으면 좋겠다고 적어 보내니 바로 전화가 왔다. 물론 주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도 있게 되었다.

버리지 말라고 한다고 자신의 개를 안 버리는 세상이 올까? 버리고 싶지 않았어도 주인이 세상에 없는 개들은 어디로 가나? 쓰레기봉투에 개를 담아 버리고 손 탁탁 털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그나마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버리는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 유기동물 현실 고려해 공급량 조절로 방향 틀어야

정부는 국정과제로 반려동물산업육성법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유기견 문제의 열악한 현실을 반영하면 반려동물 생산 유통을 장려하기보다는 유기견 문제의 근본 원인인 ‘공급 규제’와 제대로 된 보호소 운영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게 바람직하다.

지금도 땡볕에 묶어놓은 개가 쇠창살을 발톱이 다 부러지도록 긁다가 열사병으로 죽게 하는 보호소, 파트타임 수의사 하나 없는 유기견 보호소가 수두룩하다. 정부는 강아지 농장, 펫샵을 규제하지 않아 강아지를 공급하는 민간업체들의 매출을 올려주는 것도 모자라 이젠 유기견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국가가 운영하는 보호소는 턱없이 부족하고, 심지어 열악하며, 그 보호소마저 유기묘는 포기한 채, 유기견들조차 감당할 수 없어, 민간보호소가 나서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나라. 이에 지원이 없는 민간 보호소는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자원해서 민간보호소를 운영하는 선한 이들이 때마다 사료 한 포대, 담요 한 장을 위해 회원들에게 읍소해야 하는 현실.

정작 공적인 의도를 가진 이들은 점점 열악한 상황으로 몰리고,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업체들은 이익을 극대화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앞서 말한 것처럼 정부에 강아지 공장이나 펫샵등을 불법으로 규정해서 개체수를 조절할 의지가 부족해 보이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라는 데 반론을 펼칠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공급은 절대 줄지 않을 현 상황에서 이젠 강아지 공급 사업도 모자라 유기견 보호 사업까지 사설 업체들의 매출 올리기에 과연 언제까지 정부가 일조할 것인지를 묻고 싶다.

정부의 역할을 떠맡기는 것 대신, 사설 업체의 배만 불려주는 대신, 이런 역할을 차라리 정부에서 맡는 것은 어떨까? 정말 버리겠다는 사람들, 혹은 주인의 세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혹은 신체적인 부분의 고통으로 곧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차라리 위탁비용을 받아 책임을 지고 보호, 입양을 보내주는 것이 어떨까? 비용으로 보호소 운영에 도움을 주어 옛날 우리 복실이처럼 아무 것도 없이 버려진 강아지들을 관리해주고, 일주일에 얼마간이라도 수의사도 고용하고, 직원도 더 고용해서, 보호소에 사는 개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려주는 것이 더 나은 방안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되면 펫샵도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관리되지 않는다는 유기견에 대한 인식보다 “보호소에 가면 이쁜 강아지도 개도 무척 많아”라는 인식을 심어준다면 누가 굳이 펫샵까지 가서 그 잔인한 사업을 돕겠는가?

버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냐를 논하기에는 늘어나는 유기견들의 수, 열악한 보호소의 환경, 이러한 상황 개선이 보다 시급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국도에 버려지는 개,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개, 산속, 바다, 인적 드문 시골 길에 버려지는 개들이 어떻게 죽어갔느냐를 뉴스에서 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소정의 비용을 내고 보호소에 버려졌다는 편이 우리의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정부는 과연 언제까지 공공의 보호소를 죽여 갈 생각인가? 강아지 공장, 농장, 펫샵, 경매장의 공급을 막지 않아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것도 모자라, 유기견마저 상품화 시켜 더 좋은 상품,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이제껏 순수하게 노력해온 유기견 보호활동가들의 보호소마저 고사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부디 사설 업자들의 주머니를 불려주는 길로 정부의 역할을 회피하려고 드는 것을 멈췄으면 한다. 공급을 저지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근본적인 원인을 차단하지 못한 상태에서 버리지 말아달라고 양심에만 호소하는 일이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까? 부디 불필요한 희생을 줄일 수 있도록 함께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가길 바랄 뿐이다.

 이수진

 영어강사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감사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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