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의 글로 보다]

[오피니언타임스=김동진] 하루가 지나면 또 다른 이름이 흘러나온다. 초반에는 아니 저 사람도 하며 놀라고 역시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는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하다 안희정 충남지사 이름까지 나오니 충격을 넘어 오히려 담담해졌다. 이제 어떤 이름이 나와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들것 같다. (글을 쓰는 지금도 새로운 이름들과 기존 인물들에 대한 추가 폭로가 계속 올라오고 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법조계와 문화 예술계, 정치계를 넘어 나라 전체로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학창시절 무수히 많은 교사들에게 겪었던 일상적인 성폭력을 폭로하는 목소리도 넘쳐난다. 한두 군데,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위계에 의한 폭력과 왜곡된 성의식 등이 불러온 구조적 문제들이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를 통해 매일 매일 울려 퍼지고 있다.

©안희정 인스타그램

많은 피해자들이 말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왕’ 같은 존재였다고. 왕의 명령은 감히 거역할 수 없고 혹여 대항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국 피해자만 그 세계에서 쫓겨나고 만다.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악몽에 시달리고 아직도 약물에 의존해서 잠이 들지만 정작 가해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오랜 세월 자신만의 왕국의 왕으로 군림하며 부와 명예, 사회적 존경까지 모두 거머쥐었다. 실명과 얼굴까지 밝히며 용기 있게 피해사실을 폭로한 이들이 없었다면 그들은 오늘도 여전히 왕으로 군림하며 많은 이들을 마치 제 것처럼 대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궁녀들은 모두 왕의 소유였다. 왕의 선택을 받든 못 받든 한번 궁에 들어온 궁녀들은 왕 이외의 다른 남자들은 만날 수 없다. 왕은 자신의 맘에 든 궁녀들을 누구라도 자신의 처소로 부를 수 있었고 이러한 왕의 선택을 성은이라고 불렀다.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목숨을 걸고 궁을 떠나려고 하는 궁녀의 이야기가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끊임없이 다루어지는 것을 보면 궁녀들의 슬픈 운명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려고 리허설까지 했다는 그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행동이 오랫동안 이어진 나쁜 관행이었고, 잘못인 걸 알면서 한 적도 있고 어떨 때는 이게 잘못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여성의 몸을 함부로 만지고 자신의 성기 주변을 안마하게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세상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잘못된 행동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원들 앞에서 공개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적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의 성폭력은 반복적으로 계속됐다.

어떨 때는 이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는 그의 고백을 보면 그는 스스로를 정말 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궁 안의 여자들이 모두 왕의 소유이듯, 여성단원들을 자신의 성은을 기다리는 궁녀처럼 생각한 것은 아닐까? 배우의 몸을 만져 소리가 나오게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발성방법으로 배우의 능력을 끌어올리고 좋은 배역과 출연 횟수를 보장함으로써 배우들에게 일종의 ‘성은’을 베풀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이윤택 뿐만 아니라 수많은 ‘왕’들이 자신만의 왕국에서 거침없이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폭군 옆에는 간신이 있는 법이다. 간신이 왕의 폭정을 모른 체 하거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왕의 권력이 무서워서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얻는 이득도 많기 때문이다. 연극 영화판에서, 학교 안에서 그 외 수많은 곳에서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성폭력을 저지를 때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왕의 권력이 두렵다는 핑계로 그의 잘못을 모른 척하고 그 대가로 주어지는 작은 권력에 취해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의 묵인과 방조로 인해 피해자들의 고통은 가중되었고 진실이 밝혀지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이 잘못인지 모르고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된다. 왕이 백성을 다스리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왕은 뭐든지 해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김동진

한때 배고픈 영화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들 독서수업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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