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뉴스 보기 겁난다는 말이야 하루 이틀 해온 건 아니지요. 그만큼 살벌한 소식들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뉴스 시장이 신문과 TV에서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이동하면서 ‘겁나는’ 소식들은 더욱 빨리, 더욱 많이 세상에 뿌려지고 있습니다.

요즘 뉴스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단어’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성(性)’입니다. 성폭행, 성폭력, 성추행, 성…. 그런 말이 붙은 뉴스일수록 더 빨리 진화하고 더 빨리 전파됩니다. 친구를 만나도, 시장에 가도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 “언젠가는 터질 줄 알았다.” “누구는 억울하다더라”가 대화의 단골메뉴가 되었습니다.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데, 판단을 하기 전에 놀라움과 어지러움부터 엄습합니다. 진실을 재는 잣대도 자꾸 흔들립니다. 어느 경우는 분명 같은 사안인데 한쪽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고 다른 쪽은 사랑을 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뜻도 바뀔 때가 된 모양입니다.

©픽사베이

엊그제는 모처럼 도서관에 갔습니다. 특별히 찾아볼 책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고발과 변명, 증오와 소문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옛날 소도가 그랬듯이, 도서관은 여전히 안전한 피난처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보답이라도 받듯, 그곳에서 실종됐다고 생각했던 사랑 한 조각을 만났습니다.

열람실에서 만난 청년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려 넣은 것 같은 표정으로 책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서너 권의 책이 쌓여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청년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두서너 살 어려 보였습니다. 저 친구는 왜 저러고 있을까? 도서관에 왔으면 책을 읽어야지. 오지랖 넓은 저는 책 찾는 일도 잊어버리고 눈길을 자꾸 청년에게 빼앗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찾은 지 최소 7~8년 정도는 된 것 같았습니다. 도서대출증을 꺼내보니 2006년이라고 찍혀있었습니다. 그걸 만들고 몇 년 드나들다 발길을 끊은 뒤로는 모든 자료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그 얇은 증명서 안에 10년 이상의 여백이 화석처럼 찍혀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세상은 얼마나 많이 변한 걸까. 얼마나 많이 험해진 걸까. 도서관은 여전히 고요가 주인이었습니다. 변함없는 책 남새 속에서는 ‘성’도 ‘추문’도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습니다.

청년은 여전히 동상처럼 앉아있었습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 완고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제 눈을 비비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책을 한 권 든 중년 남자가 청년 앞으로 오더니 뭐라 뭐라 말을 합니다. 언뜻 언뜻 들리는 단어들을 조합해 보면 “아버지는 책 더 찾아 올 테니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들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습니다. 그린 것 같은 미소만 입가에 물고 있었습니다. 중년남자는 서두는 걸음으로 다시 서고로 갔습니다.

제가 놀란 건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얼굴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이들 부자를 다시 보다니. 순식간에 낡은 사진 한 장이 오버랩되었습니다. 기시감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7~8년 전에 몇 번 본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다만 청년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그들의 상황이 짐작됐습니다. 청년은 소위 말하는 ‘지적 장애아’(이런 말은 여전히 함부로 꺼내기 두렵습니다)인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 돌봐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청년에게 어머니가 있는지 없는지는 짐작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책을 매개로 일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려가야 할 상황인 게지요. 아이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으니 데리고 나온 것일 테고요. 그대로 앉아있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언제 어찌 될지 모르니, 책을 찾는 중에 끊임없이 와서 확인하고 다시 당부하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짐작해보건대 그렇게 보낸 세월이 최소 7~8년이었습니다. 물론 제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요. 타인의 삶을 내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체할 만한 상황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바쁜 걸음은 여러 번 계속 되고, 시간을 깔고 앉은 아들의 기다림 역시 계속되었습니다. 책상에 책 여덟 권이 쌓인 순간 아버지의 걸음이 멈춰졌습니다. “OO야, 이젠, 가자.” 청년이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뒤를 따랐습니다. 제 눈길도 그들 부자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하지만 제 일방적인 인연은 거기가 끝은 아니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작은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가던 청년이 흘끗 뒤를 돌아보더니, 종종걸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살짝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소리가 날까봐, 다른 책 읽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아주 조심스럽게 말입니다. 앞서가던 아버지가 돌아서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의자를 다 밀어 넣은 청년이 이번에는 정말 아버지를 따라 열람실 문을 나섰습니다. 그들의 뒤로 빗살 같은 사랑 한 줄기가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작지만 따뜻하고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 무엇’ 말입니다. 망연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던 저는 느닷없이 제가, 그리고 제가 사는 세상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도서관 창밖으로 봄이 성큼,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