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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출소한 숭례문 방화범[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서동철 | 승인 2018.03.16 08:58

[논객닷컴=서동철] 며칠 전 남한산성을 찾았다. 수서역 주변에 일이 있어 갔다가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멀지 않은 남한산성에 올라 순두부를 먹고 행궁(行宮) 산책이나 하자고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7일동안 머물며 항전했던 곳이다. 행궁이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지역 궁궐을 말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역대 왕은 패전의 교훈을 되새기고자 남한산성을 찾곤 했다. 숙종, 영조, 정조가 그런 왕들이었다. 임금이 마지막으로 남한산성을 찾은 것은 1867년(고종 4)이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해 행궁과 강화유수부를 불태우고 외규장각을 약탈한 것이 1866년이다. 고종이 병인양요 이듬해 남한산성을 찾은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20세기 초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는 1798년(정조 22) 지은 것이지만 1909년 이전에 이미 완전히 붕괴됐다. 다른 전각도 사정은 비슷했고, 이후 행궁터와 그 주변은 음식점과 호텔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남한산성 행궁은 1999년부터 8차례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의 위치와 규모를 다시 파악할 수 있었다. 복원 작업은 2012년 마무리됐다. 전통건축의 특성상 당연히 실측도(實測圖)같은 것은  있을 리 없었고, 프랑스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이 1890년대에 찍은 사진이 그의 저서 ‘먼 나라 꼬레’에 남아있어 그런대로 참고할 수 있었다. 한남루도 그렇게 복원했다.

이렇게 보면 지금 남한산성에서 만날 수 있는 행궁이란 21세기 들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행궁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복원됐다고 역사성 없는 건축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담하건대 100년만 세월이 흐른다면 이렇게 복원한 행궁이라도 진정성 없는 건축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010년 10월 열린 ‘남한산성 행궁 하궐준공식’에서 행사 관계자들이 복원된 행궁을 둘러보고 있다. ⓒ경기도

남한산성 행궁을 돌아보기 며칠 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컬링의 고장’으로 떠오른 경북 의성의 고운사에 갔었다. 극락전 앞의 만덕당은 해체수리를 막 끝낸 듯 단청이 되어있는 옛 서까래 사이로 단청이 되지 않은 새로운 서까래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서까래 목재가 제대로 말라 단청을 다시하면 만덕당은 옛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목조 건축이란 그런 것이다. 나무라는 건축 재료의 특성상 일정한 세월이 흐르면 벌레 먹거나 썩은 것을 들어내고 새로운 부재로 교체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지었을 만덕당도 몇차례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이런 상식을 바탕으로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생각해 보자.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무량수전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유명한 글이 아니더라도 무량수전은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고려시대 건축물이다. 부석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무량수전은 13세기 초 지은 것으로 미술사학계는 보고 있다.

무량수전은 1916년 해체·수리 과정에서 1376년(고려 우왕 2) 중창했다는 묵서명이 발견됐다. 새로 지은지 한세기 남짓 지나면서 전면 보수가 불가피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광해군 시대(1608∼1623)에는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무량수전의 전면 해체 보수는 이보다 훨씬 잦았을 것이다.

비틀리거나 썩지 않는 목재란 없다. 해체 보수를 하면서 이번에 교체하지 않은 부재는 다음 , 아니면 다음 다음 보수 때는 바꿀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농담을 전혀 섞지 않더라도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건축물이지만 오늘날 이 건물의 부재 가운데 고려시대 것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배흘림 기둥도 고려시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2015년 10월 화재 후 복원된 숭례문에서 문화재 합동 화재진압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중부소방서

다시 한양 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을 생각해 본다. 숭례문이 불에 탄 것은 2008년 2월 10일이다. 숭례문은 1395년(태조 4)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 완성했고, 1447년(세종 29) 개축했다. 1479년(성종 10)에도 보수공사가 있었다. 1961∼1963년 해체 보수했다.

숭례문은 화재 당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훼손됐다. 복원 공사는 2010년 시작되어 2013년 마무리됐다. 1960년대 해체 보수 과정에서 실측 도면을 남겨놓아 옛 모습을 되살릴 수 있었다.  화재 이후에도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고운사 만덕당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의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지난 9일에는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에 불을 붙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숭례문 방화의 기억이 생생한 때문인지 대부분의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문화유산에 불을 지르려는 시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문화유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국보 제1호나 보물 제1호 밖에 없다는 듯 특정 문화유산에만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세상의 관심을 끌려는 문화재 훼손 사범에게는 표적이 될 뿐이다.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방화나 방화 미수 사건이 잇따라도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에 대한 관심으로 그칠 뿐 다른 문화유산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쉽다. 지금도 수많은 문화유산이 개발을 명분으로 파괴되고 있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은 복원이 가능하지만 매장문화재는 한번 훼손되면 끝이다.

숭례문 방화 이후 문화유산을 감시하는데만 관심을 촉구하고 훼손사범의 처벌을 강화하는 노력에 소홀한 것도 개인적으로 불만이다.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숭례문 방화범은 지난달 만기 출소했다. 그는 2006년에도 창덕궁 문정전에 방화한 상습범이다. 죗값을 치렀다고는 하지만 다시 무슨 일을 저지를 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봐도 너무 가벼운 처벌이다. 문정전에 방화했을 때 강력한 처벌이 뒤따랐다면 숭례문에 방화할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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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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