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코리아 프리미엄 프로젝트]

[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얼마 전 중국의 전인대(全人代)에서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건의한 헌법 수정안이 99.8%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통과되었다. 이로써 연임 규정이 삭제되어 시진핑 국가주석이 사실상 종신집권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남의 나라 일이니 필자가 왈가왈부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지만 지구촌에 이성적인 시대가 만개(滿開)하기를 고대하는 입장에서 인류역사가 퇴보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또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도 2000년 이후 지금까지 한 번의 실세 총리를 비롯해 세 번째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17년 이상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시행된 선거에서 67%의 투표율에 76.66%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네 번째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2024년까지 집권할 것이다. 그 후에도 권력을 내놓지 않을 공산이 크다. 러시아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했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한 후 다시 혁명 이전의 짜르(tsar)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세계적 경제지 《The Economist》는 이미 2017년 10월 26일자 표지 모델로 푸틴을 선정한 후 타이틀을 “A tsar is born”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또한 남의 나라 일이니 필자가 시비를 걸 문제는 아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착잡한 심정이다.

그러면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은 어떤가? 현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전임 대통령들과는 달리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면서 여러 우방국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는 듯한 막말과 돌출 행동으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양산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핵미사일 문제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북한은 어떤가? 3대째 세습을 통해 권력의 정상에 있는 약관의 김정은이 과연 북한을 이성적으로 통치할 소양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의 권력은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 특권 집단과의 담합을 통해 유지되고 있기에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이성적인 질서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이처럼 한국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주변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성적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더욱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반도 주변국의 지도자들. ⓒ온라인 커뮤니티

그런데 우리 상황은 어떠한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정농단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법의 심판을 받는 수인(囚人)의 지위로 격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 또한 각종 비리 의혹에 연루되어 피의자의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되었다. 그동안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의 행보에서 이성적인 면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변 국가의 권력자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예컨대 월가에서 널리 알려진 금융 컨설턴트인 산드라 나비디가 쓴 『슈퍼허브』라는 책에 의하면 블라디미르 푸틴의 재산이 2,00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하니 세계 최고의 부자는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아니라 푸틴인 셈이다. 그가 러시아를 시장경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는 과정에 개입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내부에서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는 것은 러시아가 이성적인 사회는 아니라는 방증이다. 이는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해왔고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해왔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니 규모는 다를지언정 푸틴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아직 전모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추문에 휩싸였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사회에 이성적인 질서가 아직도 요원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국을 포함해 주변 여러 국가의 정치지도자들의 행보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성의 결핍”이라는 현상 때문이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해 용납하기 어려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크게는 인류역사를 후퇴시키고 작게는 자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정치철학자 존 엘스터(Jon Elster)가 저서 『Reason and Rationality』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성과 합리성을 구분하고자 한다. 그는 합리성을 대체로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의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이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공동선(common good)의 추구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도 그의 해석에 동의한다. 우리가 보통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 때는 도구적 합리성에 따라 개인적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한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을 때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가 이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를 뒷받침하는 단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 운동”이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이 많아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패턴은 대동소이하다. 자신의 권력과 권한을 이용해 상대방 여성의 자유의지를 무시한 채 극도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가해자들이 대체로 도구적 합리성에 입각해 행동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름의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 그런 행위가 별다른 문제없이 묻힐 것으로 간주했음에 틀림없다. 과거의 경험과 사회의 풍토에 비추어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피해자들도 지금까지는 2차 피해의 후유증을 감안할 때 자신들이 받았던 상처와 수치심을 묻어 두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도 어쩔 수 없이 도구적 합리성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피해자 중 한 사람이 휘슬블로어(whistleblower)가 되어 이 한계를 넘어서자 만천하에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용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픽사베이

몇 해 전에 작고한 정신과의사이자 영성운동가인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 박사는 저서 『의식 혁명』에서 의식지도(map of consciousness)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그는 의식 수준을 17단계로 구분한 후 가장 낮은 단계를 수치심(shame)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수치심의 수준은 위험하리만큼 죽음에 가깝다. 죽음은 수치심으로 인해 의식적 자살로 선택될 수도 있고, 혹은 삶을 연장하기 위한 조처의 불이행으로 보다 미묘하게 결정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던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여주인공 한나 슈미츠(케이트 윈슬렛 분)는 과거 나치에 협력했다는 추궁을 받는데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끝내 이 사실을 숨기고 유죄를 인정하는 길을 택한다. 공개 재판에서 문맹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느끼는 수치심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처럼 수치심은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미투 운동”의 의미가 소중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해자들의 일시적인 쾌락 충족을 위한 행위가 상대방에게는 죽음을 연상할 정도의 고통을 준다면 이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여기에 음모론 운운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피해자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해자들은 인격 살인에 버금가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범죄는 사기나 횡령과 같은 금전적 피해를 주는 범죄보다 더 엄중하게 처벌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아직 이런 취지를 반영한 법과 제도가 정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비이성적임을 시인하는 셈이다. 지금 시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가해자들의 범죄를 확인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유형의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단기적으로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절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 정치권력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파렴치한 행위, 그리고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약자인 여성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의 배경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도구적 합리성에 함몰되어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으로 웬만한 비밀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형의 비이성적인 행위가 여전히 만연하다는 것은 이들에게 봉건적 특권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일반인들은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오만과 독선이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사실은 반이성적인 행동의 덧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쾌락을 관장하는 뇌 회로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이들은 언제라도 같은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부당한 권력 행사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다 이성적인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문화를 구축하려는 공동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새로운 문화 운동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 때이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시장경제의 통합적 이해> 외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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