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송의 어둠의 경로]

[오피니언타임스=서은송]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울 시립승화원, 납골당에는 축축한 비 냄새가 켜켜이 쌓여갔다. 사람들의 서린 숨소리만이 먹먹히 허공에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붉은 꽃향기에 점점 어지러이 취해가고 있었다. 시든 꽃들의 잔향은 역한 향기를 뿜으며 내 곁에서 치근거렸다.

짙은 꽃 향이 식도를 타고 흐를 때마다, 전하지 못한 무형의 언어들이 켜켜이 쌓여 갔다. 내뱉지 못한, 전하지 못한, 그래서 더욱 순백한 하얀 어둠이 응어리가 되어 내 몸속에 깊게 고여 있었다.

엄마는 눈물로 절여진 뺨을 닦으며 연신 할아버지의 금시계를 매만졌다. 생전 할아버지가 참 좋아하시던 시계였다. 내게 남은 마지막 기억 속 할아버지는 문틈사이로 연신 흑백색 숨들을 달싹이고 계셨다.

ⓒ픽사베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던 것 같다. 아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이미 혼자 단정을 짓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불면의 밤, 한밤중에 검은색 한복을 갈아입으면서도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의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울지 않는 아빠였다.

할아버지의 혼백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듯 했다. 늦가을, 초우를 치른 아버지는 만추의 하늘을 끊임없이 더듬어보셨다. 밤하늘은 그윽한 아취로 티 한 점 없었다. 아버지께서 물큰한 알콜향을 베고 눈물을 삼킬 때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빛바랜 기억들이 그의 머릿결을 쓰다듬곤 했다.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아빠의 눈물은 그을음 위로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두텁게 스치는 유년의 잔향들이 헐거워진 틈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창백하게 흔들리는 아빠의 눈길은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만추의 밤하늘을 하염없이 걸었다. 뭇별 하나 없이 사그라든 하늘엔 어떠한 발자국도 남겨지지도, 남아 있지도 않았다. 흉터를 새겨 넣은 늙은 밤, 기억을 잠재우려는 듯 아버지는 나를 발견하고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별이 없는 밤을 무수히 견뎌낸 하늘에는 쓰라린 보름달이 떠올랐다. 빛이 생기면 그림자가 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앞으로 매년 돌아오는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릴 수가 없다. 사람 일이 참 무서운 것이, 어느 누가 자신의 결혼식 날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리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한해가 지날 때마다 그 사실이 얼마나 애달프게 아빠를 조여올까.

납골당으로 가는 버스 안에는 침묵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모두들 유언도 없이 떠나신 할아버지를 이해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숨막혔던 밤을 지나, 풀어진 햇살이 유리창 위로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견고한 비늘 속 무엇을 꼭꼭 숨기려하신 것일까. 툭툭 끊어져버린 기억들을 하나, 둘 맞춰본다.

내 마음의 비늘 속, 아버지에 대한 동정 하나 넣어두고 할아버지에 대한 작은 원망 하나 넣어두고 보여주지 않으려한다. 아무에게도.

 서은송

2016년부터 현재, 서울시 청소년 명예시장

2016/서울시 청소년의회 의장, 인권위원회 위원

뭇별마냥 흩날리는 문자의 굶주림 속에서 말 한 방울 쉽게 흘려내지 못해, 오늘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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