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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눈물의 여왕’ 이었던 이경설(李景雪)[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8.03.27 09:44

[논객닷컴=이동순] 한국영화사(韓國映畵史)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줄줄 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가장 대표적인 비극배우는 누구였을까요?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함경도 함흥 출신의 배우 전옥(全玉, 본명 전덕례)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전옥도 ‘항구의 일야’, ‘눈 나리는 밤’ 등 비롯한 여러 악극과 영화에서 최루성(催淚性) 연기를 펼쳐 ‘눈물의 여왕’이라 이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옥 이전에 이미 원조 격 눈물의 여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경설(李景雪, 1912∼1934)입니다. 그러니까 전옥은 이경설 사후에 그녀의 역할을 대신해서 ‘눈물의 여왕’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라 볼 수 있지요.

원조 ‘눈물의 여왕’ 이경설 ©이동순

이경설은 불과 열다섯의 나이에 은막(銀幕)에 데뷔해서 각종 영화와 악극에 출연하며 대중들의 최고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활동하다가 갑자기 얻게 된 몹쓸 병으로 방년 22세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이경설의 이런 안타까운 생애를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비통한 슬픔으로 꽉 메어져옵니다.

이경설은 일찍이 1912년 강원도에서 출생한 뒤 곧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배우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나중에 병이 들어 1934년 서울에서 낙향해 세상을 떠난 곳도 청진의 신암동이었으니 청진은 이경설의 진정한 고향이라 하겠습니다. 부친은 그곳 청년회 회장을 맡아했고, 이경설은 어려서 아버지의 인도로 아동들의 무대에 출연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녀시절, 이경설의 이웃에는 아주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시집을 갔다가 한 해만에 친정으로 쫓겨 와 고독하게 살다가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이경설은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큰 충격을 느꼈고, 여성에게 극히 불리한 세상의 혼인제도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영향을 주었던지 배우가 되고난 뒤에도 이경설의 표정과 연기는 항시 슬픔으로 가득한 얼굴에다 가녀린 인상, 여기에 처연한 액션까지 보태어서 부녀자 관객들은 이경설의 연기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소외된 처지에서 마구 희생당하는 조선여성의 삶에 대하여 이경설은 그 누구보다도 연민과 애정을 갖고 그것을 연기에 투영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이경설의 연기를 떠올리면 오로지 ‘눈물과 한탄’ 두 가지입니다.

©이동순

이경설은 청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예술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문을 닫았고, 고려영화제작소에 입사했지만 그 회사마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극작가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란 곳을 들어가서 작사가 왕평(王平, 본명 이응호)과 동기생이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김용환과 더불어 막역한 친구가 되었지요. 이경설은 여러 악극단에 단원으로 들어가 전국을 떠돌이로 유랑했습니다. 이 무렵에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몸이 아파도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이 무대에 올라야만 했던 서럽고 슬픈 시절이었지요.

1924년 이경설이 참가했던 동반예술단(東半藝術團)도 흩어진 악극단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악극단 공연은 신파극을 중심으로 무술, 기계체조를 곁들여서 공연을 했는데 이경설은 여기서 가수이자 배우였던 신일선(申一仙)과 함께 노래, 연기를 계속하며 대중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조금씩 쌓아갔습니다. 이경설의 나이 16세 되던 1928년 그 예술단도 덧없이 해체되어버렸고, 이후 정착하게 된 곳은 김소랑(金小浪)이 이끌던 극단 취성좌(聚星座)입니다. 여기서 이애리수(李愛利秀), 신은봉(申銀鳳)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여배우 트리오로 연기와 가창(歌唱) 두 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이경설은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 연극시장, 신무대 등으로 대중예술의 활동터전을 빈번히 옮겨 다녔습니다. 이경설이 세상을 하직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신무대 소속의 단원이었지요. 1920년대 후반 공연장 무대에는 연극의 막과 막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메워주던 막간가수(幕間歌手)가 있었습니다. 무대장치를 변경시키기 위해 일단 막을 내리고 나면 그 빈 시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커튼 앞에 나와서 노래를 들려주던 가수가 바로 막간가수입니다. 그 막간가수는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를 골라서 관객 앞에 내보냈던 것입니다. 이애리수, 이경설, 강석연, 신은봉, 김선초 등은 모두 초창기 막간가수 출신들입니다.

1928년 무렵, 당시 언론은 이경설을 이미 주목받는 배우로 지면에 널리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화차생활(火車生活)’, ‘무언(無言)의 회오(悔悟)’, ‘가거라 아버지에게로’, ‘신 칼멘’, ‘카추샤’, ‘청춘의 반생(半生)’, ‘짠발짠’, ‘눈 오는 밤’ 등의 연극에서 배우 이경설의 명성은 드높아만 갔습니다. 이경설의 연기가 지닌 특징은 매우 똑똑한 세리프와 박력이 느껴지는 연기였다고 합니다. 함경도 출신의 억양이 느껴지는 독특한 화법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극시장 시절, 이경설은 그녀 한 몸에게만 집중되는 극단에서의 과도한 출연요청을 단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무대에 오르느라 온몸이 거의 파김치가 되다시피 했었고, 이렇게 누적된 피로와 제대로 먹지 못한 영양실조 때문에 결국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경설 취입 음반 ‘국경애화’가 일제 경찰당국에 압수된 신문기사 ©이동순

배우 이경설이 정식으로 가수가 되어서 음반을 발표한 것은 1931년 봄입니다. 그녀의 생애를 통틀어 도합 44종의 음반을 내었는데, 돔보레코드에서 10편, 시에론레코드에서 6편, 폴리돌레코드에서 28편을 발표했습니다. 종류로는 유행소곡, 유행가, 유행소패, 서정소곡, 민요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가요작품이 33편으로 가장 많으며, 기타 넌센스, 스켓취, 극 등이 11편입니다. 돔보와 시에론에서는 가요만 발표했고, 폴리돌레코드사 전속이 되어서는 가요와 극을 함께 발표했습니다. 돔보에서 발표한 음반은 ‘그리운 그대여(강남제비)’, ‘아 요것이 사랑이란다’, ‘아리랑’, ‘온양온천 노래’, ‘울지를 마서요’, ‘콘도라’, ‘피식은 젊은이(방랑가)’, ‘허영의 꿈’, ‘무정한 세상’, ‘양춘가’ 등입니다.

시에론에서 발표한 음반은 ‘봄의 혼(魂)’, ‘강남제비’, ‘방랑가’, ‘온양온천 노래’, ‘인생은 초로(草露)같다’, ‘하리우드 행진곡’ 등입니다.

포리도루에서 발표한 음반은 ‘국경의 애곡(哀曲)’, ‘방아타령’, ‘세기말의 노래’, ‘그대여 그리워’, ‘얼간망둥이’, ‘조선행진곡’, ‘경성(京城)은 좋은 곳’, ‘천리원정’, ‘서울 가두풍경’, ‘이역정조곡(異域情調曲)’, ‘사막의 옛 자취’, ‘오로라의 처녀’, ‘월야(月夜)’, ‘고성(古城)의 밤’, ‘옛 고향터’, ‘도회의 밤거리’, ‘패수비가(浿水悲歌)’, ‘폐허에서’, ‘옛터를 찾아서’, ‘아리랑 한숨고개’, ‘울고 웃는 인생’, ‘청춘일기’, ‘멍텅구리 학창생활’, ‘춘희(椿姬)’, ‘고도(孤島)에 지는 꽃’, ‘망향비곡’, ‘피식은 젊은이’ 등입니다.

위의 취입앨범 가운데 출연진들의 연기로 엮어가는 극 음반이나 스켓취, 넌센스 등은 주로 동료였던 왕평, 김용환, 신은봉, 심영 등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요의 경우는 왕평, 박영호, 추야월, 김광 등의 노랫말에 김탄포(김용환), 강구야시(江口夜詩, 에구치 요시) 등이 곡을 붙인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경설이 배우로서 한창 인기가 드높던 시절에 폴리돌레코드사에서는 그녀에게 문예부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이때 이경설은 친구 왕평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기꺼이 맡겠노라고 했고 이에 대하여 폴리돌 측에서는 내부논의를 거쳐 결국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당대 대중문화계의 걸출한 두 젊은 스타가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 업무를 공동으로 맡아보는 초유(初有)의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경설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모든 업무는 주로 왕평 혼자서 보았을 테지요.

배우 이경설이 가수로서 발표한 최고의 히트작은 단연 ‘세기말의 노래’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1932년 10월에 발표된 이 가요작품은 박영호 작사, 김탄포(김용환) 작곡으로 만들었는데 식민통치에 시달리는 국토와 민족의 아픔과 불안감을 매우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는 과감한 표현들이 오늘의 우리들로 하여금 놀라움마저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정황은 일제가 축음기음반에 대한 본격적 감시와 취체(取締) 및 단속에 들어가기 직전이라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미줄로 한허리를 얽고 거문고에 오르니
일만 설움 푸른 궁창아래 궂은비만 나려라
시들퍼라 거문고야 내 사랑 거문고
까다로운 이 거리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가랑잎이 동남풍을 실어 술렁술렁 떠나면
달 떨어진 만경창파위에 가마귀만 우짖어
괴로워라 이 바다야 내 사랑 바다야
뒤숭숭한 이 바다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청산벽계 저문 날을 찾아 목탁을 울리면서
돌아가신 어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비오니
답답해라 이 마을아 내 사랑 마을아
어두워진 이 마을이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세기말의 노래’ 전문

이경설의 음반 ‘세기말의노래’ 레코드와 가사지 ©이동순

각 소절의 마무리 부분에서 표현하고 있는 ‘까다로운 이 거리’, ‘뒤숭숭한 이 바다’, ‘어두워진 이 마을’ 등은 모두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통치 때문에 빚어진 우리 국토의 고통스런 현실과 환경을 빗대어 말하는 표현들입니다. 작가는 이 가요시를 통해서 진심에 찬 어조로 고통과 불안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라는 대목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 이경설은 유행가 ‘경성은 좋은 곳’을 발표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서울의 명칭부터 먼저 경성(京城, けいじょう)으로 고쳤습니다. 도시계획조차 모두 일제의 기획과 의도 하에 정리했습니다. 거리이름도 명치정(明治町, 명동), 장곡천정(長谷川町, 소공동), 죽첨정(竹添町, 충정로), 고시정(古市町, 용산구 동자동), 대도정(大島町, 용산구 용문동) 등 그들의 침략전쟁에서 공을 세운 일본의 사무라이, 정치인, 외교관, 장군의 이름을 딴 일본식 지명과 번지로 바꾸고, 서울을 일본의 변방도시 형태로 재정비하려는 뜻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경설의 노래 ‘경성은 좋은 곳’ 가사에는 식민지시대 서울시내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오던 일본군경들의 불안한 사이렌 경보음이 실감나게 들려옵니다. 어둡고 우울한 시대였지만 청년기세대들은 제한된 공간속에서나마 청춘의 밝은 감성을 구가하려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노래와 웃음이 마음껏 펼쳐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분위기는 쓸쓸한 비애와 삶의 긴장이 감돌았을 터이지요. 가사의 표면에서는 경성이 살기 좋은 곳이라며 슬쩍 꾸몄지만 문맥 속에 감춘 실체는 삶의 불안감, 위기의식 따위가 실루엣으로 감지되기도 합니다.

서울의 새벽 요란히 들리는 저 사이렌
힘 있는 젊은이 씩씩한 걸음 굳세인 팔
서울은 좋아요 힘으로 밝히며
해 지면 한양은 청춘의 밤

종로네거리 밤이면 피는 꽃 처녀의 얼굴
청춘아 서로서로 손을 잡고 뛰어라
불러라 마음대로 씩씩하게
노래와 웃음의 서울거리로

고요한 밤 멀리서 들리는 바람도 잠든
한강물 위에 들리는 소리 구슬픈 뱃노래
서울은 좋은 곳 언제든지요
밤이나 낮이나 노래의 서울
-‘경성은 좋은 곳’ 전문

이경설의 노래 ‘경성은 조흔곳’ 가사지 ©이동순

이듬해인 1933년, 이경설의 안색은 표시가 나도록 창백해지고 기침과 각혈의 횟수가 점점 심해지기만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애리수가 불러서 히트를 했던 ‘황성의 적’을 가사와 제목만 바꾸어서 ‘고성(古城)의 밤’이란 음반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성(古城)의 밤’은 매우 특이하게도 당시 널리 알려진 노래 ‘황성의 적(황성옛터)’의 이경설 버전입니다. 이애리수, 윤백단 등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필자가 들어본 감상에 의하면 이경설 음반이 가장 처연한 울림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이경설의 처연한 목소리로 들어보는 이 노래는 특히 가을비가 처마 끝에 또드락또드락 소리를 내는 깊은 밤 자정 무렵에 들을 때 삶의 황혼녘에 다다른 이경설의 슬픔을 머금은 목소리는 명치끝을 따갑게 도려내는 듯 사뭇 가슴을 저밉니다. 이 때문인지 일제는 이경설이 부른 노래 ‘고성의 밤’을 발매 즉시 금지곡 명단으로 발표합니다.

극작가 이서구(李瑞求) 선생은 1930년대 중반, 이경설이 평양에서 잠시 결혼생활을 했던 것으로 증언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3년 이경설은 지병이었던 결핵이 점점 악화되어 일본 오사카, 북간도 용정 등지로 요양을 다녀오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경설은 1934년 8월28일 청진 신암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불과 22년의 짧았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아무리 요절(夭折)로 애달픈 삶을 마감했다 하더라도 방년 22세의 생애는 짧아도 너무나 짧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이렇게 단명운(短命運)을 타고난 것인지요?

이경설 사망 기사 ©이동순
이경설이 죽은 뒤 친구 왕평이 엮어낸 _명우의 애화_ 추억담 ©이동순

비운의 배우 이경설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90년 세월이 가까워옵니다. 오로지 무대를 집과 터전으로 삼고 가난과 굶주림을 악으로 견디며 청춘을 불살랐던 대중연예인 이경설! 우리는 그녀가 남긴 여러 사진 속의 표정과 생김새를 새삼스럽게 음미하며 응시해봅니다. 연기자로서의 이경설은 비극적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가정의 부인 역할이나 장부 역할에 능했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모든 출연작품에서 늘 과장된 연기가 그녀의 흠결(欠缺)로 지적된다는 기사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배우 이경설의 의욕과 열정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만약 이경설이 대중연예인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이름 없이 초야(草野)에 묻혀 평범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여염집 여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짧아도 강렬하게 타오르는 한 줄기 불꽃이나 섬광처럼 번뜩이는 삶을 결연히 선택했으므로 이경설의 이름은 아직도 한국의 근대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이름으로 남아있는지 모릅니다.

그녀가 사망한 다음 달 폴리돌레코드사에서는 이응호 극본 ‘춘희’를 ‘일대 여배우 이경설양 추모발매’ 유작(遺作) 음반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에는 동료 왕평, 신은봉 등과 함께 또랑또랑한 발음으로 연기하는 이경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소 억세게 느껴지는 함경도 억양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감동적인 연기를 펼치며 배우와 가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당대 최고의 스타 이경설!

말 그대로 ‘눈물의 여왕’ 원조였던 이경설의 애틋한 영혼은 지금도 전체 한국인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슬픈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여전히 우리 가슴을 적시고 있을 것입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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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dslee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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