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진의 청춘사유]

©픽사베이

[오피니언타임스=심규진] 27년간 라면만 먹었다는 김기수라는 사람이 있다. 『라면의 황제』(김희선, 2014)에 등장한 소설 속 인물인데 그는 나에게 ‘라면을 먹는 것은 나의 운명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의 고백은 곧 나의 고백이었고,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져 그만 책장을 덮었다. 1960년대 꿀꿀이죽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한국에 최초로 도입되었다는 라면은, 이제 내 삶을 설명하는 도구이자 우리들 삶의 정서에 파스텔처럼 스며든 힘찬 기운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업 부도로 도망치듯 내려간 양산(梁山)에서 처음으로 라면과의 짜릿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전에도 이미 라면을 먹어봤지만 그제야 라면 하나면 힘든 하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음을 배웠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당시 라면의 면상(麵上)을 풀어헤쳐보자면 다음과 같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좁디좁은 방에서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점심 식사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자니 물이 끓고 있다는 뜻이었고, 찢어지는 듯한 비닐 소리는 무언가 개봉(開封)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웬일인지 도마에 칼질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잠시 후 감칠맛 나게 착착 감기는 소리는 예측이 불가하여 부엌을 빠끔히 내다보았는데, 채반에 담긴 면발을 털어내는 소리였다.

면발은 차디찬 정수(淨水)에 자신의 온몸을 맡기고, 꽃단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늘 높이 공중 부양하여 물기를 벗어던지고, 다시 한 번 채에 자신을 처박아 한 올 남은 물기마저 털어냈다. 이는 어머니의 손놀림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분명, 면발 스스로 자신의 생기를 찾아가는 독립 활동이었으리라. 그랬다. 내가 라면과 첫 인연을 맺을 때의 그 모습은 빨간 옷을 입고 있는 비빔면이었고, 한 번 인연을 맺은 뒤로는 연인처럼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내 사랑 라면은 혼자서도 용감하게 먹을 수 있는 나의 양식이었고, 두 개, 세 개를 먹어도 금전적인 부담이 없는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였다.  

그러다 하루는 찬장에 있는 비빔면 두 개를 벗겨서 냄비 속에 넣을 준비를 하고, 냉장고에서 열무김치를 꺼냈다. 그러다가 문득 집 맞은편 (당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초가집에 임시로 살고 있었다) 우리 속에 갇혀있는 소(牛)와 눈이 마주쳤다. 맞은편 집은 기와집이었고, 그 옆에는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집보다 큰 소 우리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자신 앞에 수북이 쌓여있는 여물보다 내가 먹으려는 라면이 애석하게 보였는지 한참 동안 나를 주시하였다. 그의 눈가에 맺혀있는 물기는 나를 동정하는 눈물처럼 생각되었고, 그러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면을 마저 끓였다. 더욱 힘 빠지고 슬펐던 것은 그런데도 그 비빔면은 너무 맛있더라는 것이다. 한입 먹을 때마다 입 안에서 요동치는 면의 몸놀림은 가히 예술적이었기에 한 번에 꿀꺽 삼키지 못하고, 몇 번이고 곱씹었다. 마치 소 여물 씹듯이. 

이렇게 라면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지금은 초가집이 아닌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부엌 한 구석에는 언제나 라면을 한가득 쟁여두고 있고, 일주일에 2-3회는 꺼내다가 면발을 삶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단순히 한 끼를 때우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을 꺼내 먹는 것이며, 당시 온몸으로 깨달았던 인간의 태생적 가난함의 색다른 가치를 만끽하기 위해서이다.

 심규진

 한양대학교 교육공학 박사과정

 청년창업가 / 전 포스코경영연구소 컨설턴트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