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고정관념에 덧칠까지 하면서 ‘함께하는 세상’이라니…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집안 좋고 학벌 좋고 미모까지 갖춘 여성이 역시 비슷한 조건의 청년을 만났다. 서로 꿀릴 것도 없고, 마다할 이유도 없는 만남이니 곧 바로 혼담이 오갔고, 결혼 날짜를 잡은 청년은 여자 집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어느 날, 청년은 여성의 집안에서 처음 보는 ‘이상한 생명체’를 보게 되었다. 뒤틀리고 웅크린 생명체는 중증 뇌성마비인 여인의 언니였다. 당황한 청년은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상의했다. 논의 끝에 그들은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다.

유전일지도 모른다며 2세 걱정을 하게 됐고, 그 자체로써 창피하니 파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파혼 당한 여자의 집에서는 그동안 몰래 감춰 놓았던 중증의 뇌성마비인에게 ‘너 때문에 동생이 파혼당했다’며 더욱 구박하고 더욱 꽁꽁 가두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고 급기야 그 뇌성마비 여성은 죽고 말았다. 이 죽음을 본 주변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죽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잘 죽었다. 그러고 살아서 무얼 하겠는가’라고.

©픽사베이

잔인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실화를 통해 본 장애인현실이 지금도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문제인식이다. ‘뇌성마비 언니’ 사례 같은 장애인을 터부시하는 문화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 없이 행해지는 노력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름없다. UN권리협약이 발효되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든, 특히나 현실 진단없이 잘못된 인식으로 접근한 언론매체가 전하는 선정적 보도나 홍보 계몽 따위로 개선되거나 바뀔 장애인 문제란 없다.

우리의 현실인식은 장애인은 누구이며,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느냐를 제대로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장애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장애인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장애인현실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무엇을 개선하겠다는 것인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장애인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사회·국가적 노력도 있었고,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과연 우리 사회의 기본인식이나 철학은 장애인의 사회통합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부합되는 것인가?

‘사회통합’이라는 철학적·이념적 목표를 상실한 제도와 정책, 실천적 이념이 무시되거나 제한된 하위 프로그램으로는 장애인이 주류사회에 통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은 비장애인 위주로 된 모든 사회시스템에서 소외된 채 ‘장애를 장애로 느끼며’ 힘겹게 살 뿐이다. 장애인의 권리가 보장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이념의 정립이나 제도의 확립으로 ‘부조에 의한 행복(Welfare)’를 넘어서 ‘시민으로서의 온당한 권리(Rights)’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한국인을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자평한다. 또한 동방예의지국이란 칭호에 지극히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착하고 아름답다면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행하는 잔학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애인에게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는 걸까?

장애인시설이 들어와서 자기 자식이 ‘병신’을 보고 크면 안된다는 <비교육적인 교육적 이유>와 집값이 떨어진다는 <반사회적인 경제적 이유>로 지역주민들이 결사반대를 하는 까닭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소아마비를 완치시켜 똑바로 걷게 해야만 결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덧칠을 하는 부정적 편견과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는 영화나 드라마는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엄연한 현실과 그릇된 인식이 속속들이 숨어 있는 이 땅에서 과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장애인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장애인의 모든 사회적 활동들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

몇 년 전 나는 장애인 이해증진을 위해 ‘고백운동’을 하자고 외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한 사람이든 한 사회이든 새롭게 바뀌려면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죽어도 새롭게 태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고백운동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로움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일들을 다시금 점검하고 재출발하자는 것이다.

장애인문제는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되는 엄연한 사회현실이다. 같은 인권과 인격을 지닌 사람임에도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서도, 소외당해서도 안된다. 장애인문제를 바라보는 바른 눈은 <장애를 가진 ‘사람’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장애인 문제는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된다. 장애인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개인, 모든 사회는 이러한 기본명제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고백과 실천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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