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청년칼럼 청년칼럼공모전
삽질로 배운 페미니즘[논객닷컴 청년칼럼공모전 장려상]
김현경 | 승인 2018.04.10 11:19

[논객닷컴=김현경] 삐삐가 있던 시절, 함박눈이 펑펑 내렸던 크리스마스 이브. 실컷 놀다 밤이 되어서야 군대 간 동기가 남긴 음성메세지를 확인했다.

“여기에도 눈이 내려. 아…참 눈물이 난다.”

군바리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크리스마스 이브에 펑펑 내리는 눈이 주는 설레임, 썸남과 별 일없이 보낸 아쉬움 그리고 기대감! 왠지 없는 사랑도 일어날 것 같은 오늘, 강원도 어느 군에 있는 너나 서울에 있는 나나 비슷하구나. 우리를 같은 감성으로 묶어주는 함박눈에 왈칵 눈물이 나오는 찰나, 친구의 한 마디,

“저 눈, 언제 다 치우냐. 진짜 눈물 난다.”

‘이런 감성은 개뿔! 니가 그렇지!’하고 속으로 괄시했는데 요즘같은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마다 그 때가 생각난다.

©픽사베이

내가 사는 미국의 미네소타는 춥고 긴 겨울로 유명하다. 눈이 자주, 많이 내려 집 앞의 눈을 치우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이다. 집 앞 인도에 지나가던 사람이 쌓인 눈 때문에 미끄러져 다치면 집 주인을 고소할 수 있다. 그래서 눈이 내리면 차를 타고 출근하기 위해, 먹고 살 음식을 사기 위해, 그리고 고소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눈을 치운다. 가정용 제설 기계가 있으면 한결 편하지만 바닥에 얇게 쌓인 눈은 제설 기계로도 잘 안 치워져 결국 삽으로 마무리해야 깨끗하다. 눈이 가벼워 제설 작업이 쉬워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치워야 할 눈이 많고, 간혹 습기를 머금은 눈은 무겁기 때문에 삽질은 고된 노동이 된다.

이 모든 걸 몰랐던 첫 해 겨울, 강원도 대관령의 눈에 몇 배 넘는 눈이 내렸다. 남편은 밥 먹다 말고 눈을 치우려 나갔는데 한 시간 넘게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았다. 영하 15도를 밑도는 날씨에 고강도 노동으로 혈관이 터져 눈 치우다 사람 죽는 경우도 있다는 뉴스에 남편도 골로 갈까 걱정되고, 식사도 끝까지 못했다는 안쓰러움과 한 집에 사는 도의적 책임감도 들어 밖으로 나갔다.

“내가 좀 도와줄까?”

당연히 괜찮다고 안 도와줘도 된다는 말을 기대하고 물었는데, 남편의 반응은 “왜 이제서야 나와?!”

평소에 집안일도 잘 도와주는 사람이라 이런 반응은 의외였다. 내뱉은 말도 있어 자존심에 같이 눈치우는 삽질을 했다. 처음 5분은 군대 경험한다 싶어 해볼 만 했다. 10분 지나자 오래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 내려 눈물 난다는 동기의 음성 메시지 참뜻을 비로소 이해되었다. XX야, 그 때 찰지게 욕했던 것 진심으로 미안하다. 30분이나 삽질을 했지만 줄어들지 않던 눈을 보니 욕이 자동발사되었다. 삽질을 하다 이상한 기계음에 고개를 돌리니 건너 옆옆집은 작은 제설 기계로 눈을 치운다.
아랍의 만수르보다 더 부러운 순간이다.

“당신, 나한테 잘해! 이렇게 같이 삽질하는 와이프 어디 있어?”
라고 큰 소리 치려 했는데, 이런! 옆집을 보니 아줌마와 아저씨가 나와서 삽으로 눈을 치운다. 심지어 건너편 집은 여자 혼자 나와서 제설 삽질을 했다. 남편에게 양성평등과 페미니즘에 무장된 의식있는 여성으로 자랑하고 싶었지만 삽질 30분으로는 부족했다.

‘원래 모두 나와서 치우는 건가? 아니야, 저 여자들은 덩치가 크니까 그런거야.’
며칠 뒤 무료 ESL에 자원봉사를 하는 나 보다 작은 Rosie에게 나의 삽질 무용담을 풀었다.
(Rosie의 남편은 돈 잘 버는 의사였는데 아직도 눈을 삽으로 치운다고 했다.)

“그게 미네소타 라이프이지. 우리 남편도 출근해야해서 자기 자동차 나갈 길만 치우고 가고 오후에 내차가 나갈 길은 내가 치워. 삽질도 요령껏 해야지 안 그러면 너 허리 다친다. 삽질을 할 때는 무릎을 굽혔다가….”
친절하게 제설 삽질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60대 할머니 앞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남자는 파랑, 여자는 꽃분홍이란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생물학적 차이는 있고 그로 인해 역할의 차이가 있으니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섬세한 여자가 부엌일을 더 잘하고 힘 센 남자는 눈치우는 일을 잘 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요리나 설거지 같은 집안 일을 ‘도와주는’ 남편에게 고마웠고 힘이 드는 삽질을 ‘도와주니’ 남편도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상 힘든 노동을 해보니 남녀의 신체적 차이가 있으나 연습과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힘의 차이가 있다면 힘 센남자 한번 할 때 내가 두 번 하면 된다.) 여성이 신체적 차이를 넘을 때 권리와 기회 또한 동등해질 수있다고 생각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많은 눈이 내렸고 남편과 같이 삽질을 했다. 그리고 남편 또한 작년보다 더 많이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고 ‘자기 일’로 한다. 내가 삽질한 만큼 남자와 동등한 노동과 대가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게 요즘 깨달은 페미니즘이다.

김현경  aerkuli@gmail.com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매체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논객닷컴 |(03129)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24, 902호 | 대표전화 : 070-7728-8565 | 팩스 : 02-737-88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재
제호: 논객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78 | 등록일 2011년 9월 27일 | 발행일: 2011년 10월 1일 | 발행ㆍ편집인 : 권혁찬
Copyright © 2018 논객닷컴.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