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의 글로 보다]

[오피니언타임스=김동진] 어렸을 때 나에게 ‘한오백년’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한오백년은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를 보고 가족들이 놀리듯 붙여준 이름이다. 그때 나의 좌우명은 ‘반짇고리처럼 살자’였는데 뽑아도 뽑아도 계속 나오는 색색들이 실처럼 가늘게 아주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 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오래 살고 싶다는 것 보다는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죽는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고, 죽으면 내가 없어진다는 것인데 그럼 나는 어디로 갈 것이며, 내가 없는데 이 세상은 계속 돌아가는 건지, 착한 일 많이 하면 천국 가서 다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건지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아무리 혼자 생각하고 주변 어른들에게 물어봐도 궁금증은 말끔히 해결되지 않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만 커져갔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평소 혈압이 높았던 아버지는 그즈음 사업에 문제가 생겨 마음고생이 심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쓰러진 후 급히 응급실로 옮겼지만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잠결에, 형의 등에 업혀 허겁지겁 빠져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그 이후인지 그전부터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즈음 한번 잠이 들면 아침에 다시 눈을 못 뜰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다. 깜깜한 방에서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칠흑 같은 어둠이 너무 무서웠고, 이대로 어둠속에 나도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한동안 불을 켜고 한참을 뒤척거리다 잠이 들곤 했다.

©픽사베이

지금은 오히려 깜깜한 어둠속에서 잠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한때 나를 힘들게 했던 죽음과 어둠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난 종교가 없고 사후세계도 믿지 않는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죽음 뒤에 뭐가 있을지에 대해서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고 나란 존재는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걸 담담히 받아들인다. 다만 아이와 아내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다, 적당한 때에 크게 아픈 곳 없이 편안히 잠들 듯 떠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을 뿐이다. 한번 잠들면 다시 못 깰 것을 두려워하던 아이가 편하게 잠자듯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다니 그 변화가 새삼 놀랍기도 하다.

얼마 전 강원도 원주에서 8살 아이가 외삼촌 박모씨에게 두 시간 동안 폭행당하다 졸립다며 쓰러진 뒤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에 아이가 입술에 침을 묻히고 거짓말을 자주 해서 훈육차원의 체벌이었다고 박씨는 진술했다. 8살 아이의 몸은 오래된 멍 위에 새로운 멍이 겹쳐 온통 멍으로 가득했다. 고작 8살밖에 안된 아이를 훈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무참히 때려 숨지게 한 박씨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차오른다. 마음 같아선 당신도 똑같은 고통을 느껴보라고 그의 행동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외삼촌 눈치 보느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껏 제대로 아파하지도 못했을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에게 이제 더 이상 고통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다음 세상에서는 이런 아픔 겪지 말라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다음 세상은 없다고 믿는 나의 세계관에서 그 아이는 사라졌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8년 동안 그 아이가 우리 곁에서 살아있었고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었으나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는 것을.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살아있는 내가 하는 것이다. 아이의 죽음이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끔찍한 폭력으로 고통 받는 또 다른 아이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아이는 없다. 난 그게 너무 아프다.

김동진

한때 배고픈 영화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들 독서수업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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