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봄 눈 녹은 물이 콸콸 흐르는 높은 산 깊은 계곡에 핀 모데미풀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화를 선사하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Megaleranthis saniculifolia Ohwi.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25년 전인 1993년 문화유산 답사 열풍을 일으켰던 미술사학자 유홍준 씨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내면서 서문에 소개해 널리 알려진 글귀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 유한준(俞漢雋)이 남겼다는 이 명문을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데, 바로 이 땅의 풀과 나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꽃샘추위가 간간이 기승을 부렸다 한들 화창한 봄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요. 산마다 골마다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피고 매화, 산수유, 벚꽃이 동리마다 하얗고 노란 꽃 대궐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자라는 작은 풀 포기 하나, 나무 하나 사랑하고 아끼는 이는 개나리와 진달래, 매화, 벚꽃 등 키 큰 나무 꽃들이 피기 오래전부터 이미 많은 봄꽃이 새봄의 환희를 노래해 왔음을 알고, 함께 즐겼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서 더 많이 알게 된 만큼 더 많은 기쁨을 누렸다고 할까요.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에서 이르면 정초부터 피기 시작한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을 시작으로, 엄동설한 중 높고 깊은 산골짝 얼음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노루귀와 너도바람꽃, 얼레지, 들바람꽃, 꿩의바람꽃, 현호색 등등. 키 10cm 안팎에 콩나물 모양의 연약하기 그지없는 꽃대를 꽁꽁 언 땅 위로 밀어 올려 꽃을 피우는 이들 풀꽃은 진정 이른 봄 인적 드문 산과 계곡의 부지런한 주인들입니다.

순차적으로 피어 각각 열흘 안팎 화려한 개화기를 보내고 흔적도 없이 스러진 이들 풀꽃의 뒤를 이어 3월 말부터 전국의 크고 작은 산에서는 아주 특별한 봄꽃이 새하얀 얼굴을 내밉니다. 한국 특산식물인 모데미풀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하얗게 피어난 모데미풀. 하얀 꽃도, 연두색 열매도 별을 닮았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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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지리산 자락인 운봉의 ‘모뎀골’ 또는 ‘모데미마을’이란 곳에서 처음 발견돼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영어 이름도 모데미풀(Modemipul)입니다. 학명에 오이(Ohwi)란 일본성이 들어간 것은 당시 발견자가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뎀골이나 모데미마을이 어디인지 확인되지 않아 꽃이 피어 있던 ‘무덤’을 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모데미’란 엉뚱한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학명 중 종명 메갈에란티스(Megaleranthis)는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가스(megas)와 너도바람꽃(Eranthis)의 합성어입니다. 실제로 10cm 안팎의 줄기 끝에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하나씩 달리는데, 꽃은 순백의 너도바람꽃을 닮았지만 크기는 2배쯤 됩니다.

하늘이 외로운 날엔 풀도 눈을 뜬다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는 하늘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아도
하늘은 눈물을 그치며 웃음 짓는다

문효치의 시 ‘모데미풀’에서

춘삼월(春三月)도 지난 4월 느닷없이 쏟아진 눈에 갇힌 모데미풀. 흰 눈을 뒤집어썼어도, 흰 눈에 덮였어도 초롱초롱한 얼굴은 빛이 난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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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처럼 티 없이 맑은 어린 아기가 함박웃음을 짓듯 창공을 향해 활짝 꽃잎을 펼친 모데미풀을 보면 하늘도 눈물을 그치고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 특산식물이란 전 세계에서 우리 땅에서만 피고 자라는 고유종이라는 뜻인데, 이는 거꾸로 한반도에서 사라지면 지구상에서 아예 없어지는 것이므로 영구 보존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직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멀리 제주도 한라산에서부터 지리산과 오대산, 광덕산, 청태산, 태백산, 설악산을 거쳐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진 강원도 점봉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주요 산의 해발 800m가 넘는 습지나 능선 부근에서 꽃을 피웁니다.

특히 소백산 정상 부근은 한국 최대(한국에만 있으니 세계 최대라는 말도 된다) 규모의 자생지가 펼쳐지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따라 모데미풀은 소백산의 생태계를 대표하는 깃대종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산·아고산대가 자생지인 특성으로 인해 늦은 봄인 4~5월 개화하지만, 사진작가들에게 종종 그림 같은 설중화(雪中花)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분명 비가 내리지만, 같은 날 같은 산이라도 정상 부근 고지대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투명한 봄 햇살을 맞아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모데미풀.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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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끝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사족처럼 덧붙입니다. “모든 유물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도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빛을 발할 수 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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