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좋은 습관’ 캠페인]

3. 페르푸메

노타모레와 부키는 위대한 기억의 신목이 마지막에 흘렸던 신비한 향을 떠올리면서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페르푸메(Perfume)라는 향을 만들어 냈다. 겸손한 노타모레는 그 향이 자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위대한 기억의 나무가 전해준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전해준 뜻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노타모레는 핀란드 숲 쪽을 향해 존경과 사랑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 위대한 기억의 나무님,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건조한 나무 향의 페르푸메는 처음에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은은하여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향이었다. 그럼에도 후각이 예민하거나 책과 노트를 가까이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페르푸메를 인식했다. 그런데 허세 부키는 사람들이 향만을 미미하게 알아차리는 걸로는 성미가 차지 않았다. 페르푸메에 한 가지의 마법 가루를 더 뿌렸다. 마법 가루는 페르푸메를 사람에게 옮겨 그 사람만의 우아한 체취로 바꿔버리는 효능이 있었다. 물론 책과 노트를 아주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만 특별히. 그런 사람들의 눈은 대체로 샘처럼 깊었고 음성은 품위가 있었다. 두 요정들의 귀여운 음모로 페르푸메가 몸에 베인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향을 분명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인간 세상에 페르푸메가 몸에 베인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지식인, 교양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겸손으로 가장된 오만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 책과 노트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그것은 권위이며 품격이었으니까.

“ 페르푸메? 오! 요 녀석 제법인데... ”

서지향(書紙香) 또는 문자향(文字香)이라고 하는 서적 냄새를 페르푸메라고 이름 붙인 아들의 재치에 문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가 나왔다. 남편의 빈자리 몫까지 해내느라 아들의 취미부터 고민까지 무엇이든 알려고 노력했던 그녀였지만 우디를 다 알지는 못했나 보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아들의 재치에 놀라며, 한편으로는 소녀시절 자신이 문득 그리워졌다.

‘ 나도 그러고 보니 페르푸메에 빠진 거였구나. 후후.’

문지는 읽던 노트를 들어 코에 들이댔다. 첫 번째보다 더 크게 들이마신 두 번째 들숨에서 그녀는 확실히 페르푸메를 느꼈다. 문지는 다시 우디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이은경 화가 겸 치유예술가의 드로잉 노트, 낙서 메모. ©이은경

요정들의 재치 덕분에 거리 곳곳에서 페르푸메 향이 흘러나왔다. 페르푸메 향은 이제 동경의 향이 되었다. 아가씨들은 그런 향이 배인 남자들의 러브레터를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 전에는 칼을 잘 쓰고 땅이나 돈을 가진 남자들이 존경받았었지만 이제 세상이 변한 것이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힘이 숭상되던 과거에는 어림도 없던 생각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페르푸메 향에 익숙해졌다.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으로 책을 읽고 노트를 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들은 책과 기록의 힘을 신뢰했고, 그 중 소수의 영적인 사람들은 위대한 기억의 나무 이야기를 믿게 되었다. 책과 노트를 사람들이 소비하면 소비할수록 나무를 더 많이 베어야 했다. 요정들은 이대로라면 숲이 사라져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믿는 마음이 있었다. 나무는 지구의 수호자로서 엄청난 번식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산과 숲에 나무를 심었다. 이것은 전에 없던 놀라운 변화였다.

위대한 기억 나무와 함께 숲을 떠난 요정들의 황금시대는 페르푸메 덕분에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도서관과 서점이 늘어날수록 부키의 허세와 수다는 점점 늘어갔다. 술과 커피를 마시면서도 사람들은 책의 내용을 가지고 논쟁했다. 책과 노트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켜줬다. 덕분에 인간이 기계를 만드는 능력은 더 좋아졌다. 인간은 원래 빈약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그들은 도구를 계속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이 지구를 지배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은 마침내 타자기를 발명했다. 자판에 열 손가락으로 글을 치는 것이다. 글은 부호로 쪼개졌다. 집필이 더 편리해졌고 타자수 여자들은 선망의 자리가 되었다.

부키와 노타모레는 서점에 설치된 타지기 위에 앉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 저 빠름, 너무 멋지지 않아? 이제 훨씬 더 많은 책이 나올 거야. 크크.”
“ 저 아가씨 손놀림 좀 봐. 보이지가 않는군.”

두 요정은 서로 마주 보며 자신들이 키운 인간들의 성취를 기뻐했다. 그러나 두 요정은 인간들이 기계로 글을 치는 이 타자기가 발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그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신기함에 빠져 미처 위대한 기억의 나무에게 그 뜻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노타모레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페르푸메 향이 옅어지는 것을 부키도 눈치 채지 못했다. 타타-탁, 탁 탁 타자기의 시끄러운 소리와 부키의 수다는 궁합이 잘 맞았다. 책이 더 많이 만들어졌고 부키는 점점 더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부키는 런던 동경 뉴욕 서울 등 대표적인 책 도시를 돌아다니며 책의 향연을 즐겼다. 그러다가 가끔 서점에서 각양각색 노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노타모레를 만나면 바쁘다고 투정을 부렸다.

“ 저 노트들 좀 봐. 너무 아름답지, 부키?”
그러나 이즈음 부키는 노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노트보다 책이 훨씬 많지. 책은 이제 예술이 되어 간다구. 우리가 만든 페르푸메 효과가 있나봐. 어딜 가든 환영받아…. 근데 아유 너무 피곤해!”

부키는 우리가 만든 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노타모레의 귀에서 빛이 났다.
“ 사실은 부키가 바빠지면서 나도 덩달아 바빠졌어. 노트에서 책이 만들어지잖아. 책 읽는 사람들은 다시 노트를 좋아하고. 히히. 네가 더 바빴으면 좋겠어.”

부키가 기뻐하며 매미 날개를 파닥였다. 문자들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 오! 확실히 너는 뭐를 아는구나. 그렇지 다 내 덕이지. 언젠가 위대한 기억의 나무가 부활하면 우리를 칭찬해주실 거야. 아이 신나.”

이 말에 같이 즐거워하다가 갑자기 노타모레가 조금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눈에 유선무늬가 선명하지 않았다.

“ 부키. 그런데... 난 요즘 가끔 불안해.”
“ 뭐라고. 왜 불안한데?”
노타모레가 서점 안쪽을 가리켰다.
“ 부키, 우리 페르푸메가 좀 옅어진 것 같지 않아? 저 봐, 저기 저 타자수 아가씨. 페르푸메가 느껴져? 저 아가씨에게서는 페르푸메 대신에 남자를 꼬이려는 암내만 난다고.”

부키가 그쪽을 보고는 휙 날아갔다가 왔다. 확실히 그랬다. 그러나 부키는 노타모레 불안을 인정하지 않았다.

“ 바보야, 페르푸메는 저 아가씨한테서는 안 나지. 당연히. 저기서 출력되는 종이에서 나오는 거지. 왜 이래 노타모레? 응?”

부키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출력되는 종이에서도 페르푸메는 느껴지지 않았다. 노타모레가 좀 힘없이 웃으며 마지못해 부키에게 동의했다.

“ 그래? 그런데... 응 아니야. 아니야 내가 잘못... 근데 신목이 우리에게 페르푸메를 전해준 이유를 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때만은 노타모레 귀에서 영롱한 빛이 나지 않았다. 부키는 이때 실수를 했다. 부키는 노타모레가 원래 직관과 상상력이 뛰어난 요정이라는 것을 알았어야했다.

위대한 기억의 나무가 만든 페르푸메 계는 이렇게 아주 미세한 곳에서 균열이 오고 있었다. 타자수 아가씨의 암내에서. 그를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키의 방심에서.

* 연재기간 중 좋은 노트 습관을 가진 분의 기고, 종이노트로 달라진 사례, 자발적인 샘플 노트 사진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관련 내용을 오피니언타임스 이메일(news34567@opiniontimes.co.kr)로 보내주시면 <노트의 요정> 연재 중이나 이후 보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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