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정통성이 부족했던 왕들의 고민과 신도비의 부활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소재한 동구릉은 말 그대로 아홉 개의 능역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는 동구릉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능이라면 ‘건원릉(健元陵)’을 꼽을 수 있다. 건원릉은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능역으로 이후 조선왕릉의 표준이 되었다.

건원릉,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다른 왕릉과 달리 함흥 억새가 심어져 있다. ©김희태

특히 건원릉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신도비란 해당 인물의 생애와 공적 등을 새긴 비석으로, 보통 종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이들만이 세울 수 있었다. 현재까지 능에 신도비가 세워진 예는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齊陵)’과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릉(獻陵)’,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영릉(英陵)’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 영릉의 신도비다. 이러한 신도비의 재질과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은 헌릉의 신도비를 강화도호부에서 생산된 ‘청란석(靑蘭石)’으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각별하게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건원릉에 세워진 신도비 ©김희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릉에 세워진 신도비 ©김희태

하지만 영릉의 신도비를 끝으로 더 이상 왕릉에 신도비가 세워지지 않았다. 이는 신도비가 사라진 당시의 정국과 관련이 있는데, 계유정난(1453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세조 재위 1455~1468)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결국 단종은 사육신과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을 빌미로 영월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오명을 받은 세조였기에 이러한 행적을 신도비에 남긴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왕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 남겨진다는 점에서 굳이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점 역시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영향으로 ‘능(陵)’에서 신도비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160년 만에 부활한 신도비, 순강원에 세워진 이유는?

이처럼 사라진 신도비는 세조 이후 160년이 지나 다시 출현했다. 그 시작은 ‘순강원(順康園)’으로,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의 ‘원소(園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왕릉은 크게 능, 원, 묘로 나누어지는데, 능의 경우 왕과 왕비, 대비가 묻힐 때 불린다. ‘원(圓)’은 세자와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 등에 한해 붙여진 명칭으로, 그 이외에는 모두 묘로 불렀다. 묘와 달리 능과 원은 조선왕릉의 기본 형태인 진입 공간과 제향 공간, 능(원)침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왜 16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신도비는 부활했을까? 그것도 능이 아닌 원에서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김포 장릉,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했다. ©김희태

이는 순강원 이후 신도비를 세우는 왕들의 상황을 보면 쉽게 정리가 된다. 즉 신도비를 세웠던 인조나 영조는 모두 정통성과 관련해 부담을 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인 정원군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정원군의 성격이 포악하고, 행실과 관련해 문제가 있음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다. 이런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즉 반정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인지 인조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세우는데 크게 집착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한 일이다. 물론 앞서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추존 덕종, 1438~1457)가 왕으로 추존된 사례가 있긴 했지만, 엄연히 세자의 신분이었던데 비해 정원군은 일개 왕자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 끝에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했다.

순강원의 신도비, 인조 때 신도비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김희태

이를 통해 인빈 김씨 역시 왕을 낳은 후궁으로 그 지위가 변화하게 된다. 1636년 인조는 인빈 김씨의 신도비를 세우게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후 영조 때 인빈 김씨의 묘는 순강원으로 격상이 되고, 수봉관 2인을 두는가 하면 영조 자신이 직접 순강원을 찾아 제향을 지내는 등 극진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신도비의 비문을 지은 이가 인빈 김씨의 아들인 의창군으로, 현재 순강원 내에 의창군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소령원의 신도비, 어머니를 생각했던 영조의 모습

순강원에 이어 ‘소령원(昭寧園)’에서도 신도비가 등장했는데, 소령원은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원소다. 숙빈 최씨는 내명부에서 품계조차 없는 무수리 출신으로, 어머니의 낮은 신분은 영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파주시 광탄면에 소재한 소령원은 연잉군 시절의 영조가 직접 지관을 데리고 찾은 장소로, 묘비까지 직접 쓸 정도로 어머니를 생각했던 영조였다.

소령원의 신도비, 영조는 신도비가 빨리 세워지도록 독려했다. ©김희태

이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격상시킨데 이어, 신도비를 세우도록 했다. 신도비에는 숙빈 최씨의 생애와 공적을 기록해 그 위상을 높이려는 조치로, 일종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소령원 신도비의 귀부에는 목 부분에 ‘왕(王)’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비석에 쓸 돌을 구입하는가 하면 크기를 줄여서라도 빨리 신도비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독려했던 영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도비의 귀부에 새겨진 ‘왕(王)’, 신도비의 부활을 통해 당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김희태

이처럼 조선 후기에 원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신도비는 공통적으로 정통성이 부족했던 왕들의 고민 속에 세워진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조선이 건국될 당시 세워졌던 신도비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왕릉의 신도비 가운데, 지난 2013년 건원릉의 신도비(보물 제1803호), 헌릉의 신도비(보물 제1804호), 영릉의 신도비(보물 제1805호)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신도비를 통해 당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화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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