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공모전 가작]

“우리가 취업을 했으면 안 이랬겠지?”
“... 그랬겠지?”

이 말을 끝으로 동생과 나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봉천역 3번 출구를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생각보다 길었다. 그 가격에 구할 수 있는 방은 없다는 말을 들은 게 오늘만 5번째인지 6번째인지 헷갈렸다. 정말 취업에만 성공했으면 달랐을까. 그동안 난 뭘 한걸까. 누군가 어깨를 치고 지나가듯 현기증이 일었다. 신림역과 낙성대역에서 돌아야 할 공인중개 사무소가 총 7곳이었고,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밭에 나가계실 시간이었다. 우리는 힘을 내야 했다.

봉천, 신촌, 이대, 상도.. 한 달 전 인문 학부 과정을 마친 우리 남매는 서울 전역을 돌며 원룸 월세를 찾았다. 방을 구할 때 우리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벽이 합판이 아닐 것과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25만원 이하일 것. 한 공인 중개사는 “어려서 잘 몰라서 그런데”로 시작하는 연설로 우리의 조건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이해시키려 했다. 서러움 같기도, 분노 같기도 한 감정이 밀려왔다. 우리의 합산 보증금 4,000만원은 시골의 부모님이 “마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달이 빠져 나가는 월세 대신, 보증금을 높이고 월세를 깎는 게 부담이 덜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그 많은 돈을 누구에게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물을 때면 당신들은 늘 “최선만 다해”라고 하셨다. 최선만 다해라. 맞는 말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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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最善)의 사전적 정의는 ‘가장 좋고 훌륭함’ 또는 ‘온 정성과 힘을 들임’이다. 전자는 결과로서의 최선을, 후자는 과정으로서의 최선을 뜻한다. ‘가장 좋고 훌륭’해지기 위하여, 청년들은 ‘온 정성과 힘’을 과정에 쏟는다. 시험 기간에 밤을 새고, 장학금 서류를 떼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대외활동 회의실로 달려간다. 며칠 밤을 새워 쓴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불합격입니다” 같은 한 마디 답변조차 받지 못하는 나날을 반복한다. 우리 남매의 과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취업으로 상징되는, ‘가장 좋고 훌륭한’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으므로 동생과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걸까. 같은 논리대로라면 방값을 충분히 못줘 미안하다던 부모님의 그간 노력도 최선의 노력은 아니었던 걸까. 글쎄.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결과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결과가 갖는 경제성 때문이다. ‘00대 합격’, ‘00사 입사’와 같은 결과는 한 사람의 성실성과 통찰력 등을 판별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이다. 한 개인의 가치를 알기 위해 그 사람의 전기를 읽는 대신 결과를 표현한 몇 문장만 훑으면 되니 편리하다. 하지만 정말 그거면 된 걸까. 사회가 인정하는 결과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위치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의 과정은 충분히 조명되고 있는 걸까. 과정과 노력이 인정받는 사회였다면 “아버지의 업무 트럭에 스스럼없이 타시네요?”라던 기자의 질문도, “그게 왜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다”는 한 국가대표 선수의 답변도 필요 없지 않았을까.

결국 나와 동생은 관악구 대학동의 원룸 두 채를 계약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며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매일 밭으로 출근해 잡초를 뽑는 부모님도, 포장마차 앞에 선 채 컵밥을 뜨는 청년들의 하루도 그러할 것이다. ‘가장 좋고 훌륭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 정성과 힘’을 기울인 노력이 폄하되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기다린다. [오피니언타임스=박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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