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지난 2016년 가을, 서울지방경찰청은 도굴한 고려청자를 팔려는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문화재청과 공조 수사에 들어간다. 청자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것이라고 했다. 태안 안흥의 마도 해역은 2007년 이후 4척의 고려·조선시대 침몰선을 발굴 조사한 해양 문화재의 보고다.

그런데 수사가 진척되고 청자 출토 지역을 확인한 문화재청 해양문화재연구소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도굴 장소가 침몰선이 많았던 안흥 앞바다나 안면도 서쪽 쌀썩은여가 아니라 안면도 동쪽의 최북단인 천수만 당암포 해역이었기 때문이다.

안흥 해역은 파도가 높은데다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조류도 빨라 침몰사고가 잦았다. 통과하기 어렵다고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릴 정도였다. 지금까지 정식 발굴 조사는 물론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온 것까지 이 해역에서 출토된 유물의 시대와 국적은 다양하다. 고려자기는 11세기 해무리굽 청자부터 14세기 후반 상감청자까지 질과 양에서 풍부하다.

조선시대 것도 15세기 분청사기와 17~18세기 백자가 다채롭다. 중국 것은 송·원시대 청자와 15~16세기 명나라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청화백자, 18~19세기 청나라 백자를 망라한다. 그만큼 많은 배가 침몰했고 배에 실었던 화물이 여전히 해저에 나뒹굴고 있다는 뜻이다. 쌀썩은여는 특히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실은 조운선이 수없이 침몰하면서 쌀썩는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청자를 실은 화물선이 칠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태안 당암포 해역과 태안반도 일대의 조선시대 운하 개착 계획. ©문화재청 제공

조선시대 서해안에서 침몰한 세곡선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태조4년(1395)에는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악천후로 침몰했다. 태종 3년(1403)에는 5월에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다시 6월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이 잇따라 피해를 입었다. 태종14년(1414)에는 전라도 조운선 66척, 세조 원년(1455)에도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가라앉았다. 어떤 해는 배로 나르던 세곡의 3분의 1 가까이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안면도가 이름처럼 섬이 된 오늘날 고려시대 청자를 실은 화물선이 당암포에서 침몰했다는 소식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안면도는 섬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안면운하 개착은 조선 인조 연간(1623~1649)부터 본격 추진되어 17세기 후반 마무리됐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은 서해안 항로의 2대 난코스라 할 수 있는 쌀썩은여와 난행량과 마주친다. 운하로 안면도 북단을 가로지르면 적어도 쌀썩은여는 피할 수 있다. 안면운하 개착은 아마도 조선 최대의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선조들이 스케일이 작았다는 것은 옳은 평가일 수 없다. 살썩은여와 난행량을 회피하고자 아예 태안반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운하를 파려는 구상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시작됐다. 그만큼 세곡선 침몰이 국가 재정을 어렵게 했다는 뜻일 것이다.

태안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운하의 대안으로 조선 인조시대부터 파기 시작한 안면 운하의 안면 대교. 이로써 반도였던 안면도는 섬이 됐다. ©서동철

고려 인종 12년(1134)에는 군졸 수천명을 풀어 운하공사를 벌였고, 의종 8년(1154)에도 운하 개착 시도가 있었다. 공양왕 3년(1391) 공사를 재개했으나 화강암 암반이 나타나는 바람에 중단됐다. 태안반도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였다. 지금의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를 연결하는 12㎞구간이다. 갯벌이 8㎞ 안팎으로 난공사 구간은 4㎞ 정도라고 한다.

굴포운하는 조선시대에도 태종과 태조에 이어 세조까지 줄기차게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대안은 태안군 소현면 송현리와 의항리를 잇는 의항운하였다. 안흥에서 가까운 의항운하는 2㎞만 파면 난행량을 피할 수 있었다. 중종 32년(1537) 승려 5000명을 동원해 완성하지만, 둑이 계속 무너지는 바람에 다시 메워지고 말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런 일도 있었다. 태종 12년(1412) 조운선의 침몰 대책을 논의하면서 하륜은 “고려시대 운하를 뚫던 곳에 지형이 높고 낮음에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제방마다 소선(小船)을 두며, 조운선이 제방에 이르면 세곡을 그 위 제방의 소선에 옮겨 싣고, 다시 둑 아래 소선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렇게 차례로 운반하면 배가 전복하는 근심을 면할 것“이라고 주청한다. 일종의 계단식 운하를 구상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현지조사 끝에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암포의 고려청자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륜의 건의에서 보듯 세곡선이 쌀썩은여와 난행량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안면도 동쪽의 천수만으로 들어온 배가 운하든, 육로든 태안반도를 관통하는 방법 뿐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운하의 대안으로 삼남의 세곡선이 천수만 북쪽에 부린 세곡을 육로로 북쪽 가로림만까지 수송하고, 다시 세곡선에 실어 도성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안면도 서쪽의 쌀썩은여. 호남평야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나르던 배가 이곳에서 수없이 침몰해 쌀썩는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서동철

당암포의 고려청자가 이미 고려시대에 육로로 태안반도를 관통하는 루트를 이용한 증거인지는 발굴 조사가 진척되어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마침 문화재청은 지난 10일  당암포 수중유적에 대한 제2차 수중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2016년 12월 긴급 수중 탐사와 지난해 제1차 발굴 조사에서 50점 남짓한 고려청자를 수습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선박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태안은 개경을 오가는 송나라 사신이 머물다 가는 객관 안흥정이 있는 국제 항로의 일부이기도 했다. 안흥정에 관한 기록은 송나라 사람 서긍(1091~1153)이 남긴 ‘고려도경’에도 보인다. 그런데 송나라 사신이  해로가 아닌 육로로 태안반도를 건넌 적도 있었다. 태안 객관이 안흥 마도가 아닌 천수만 남쪽 지금의 부석면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수중 발굴 조사에서는 무엇보다도 청자들이 강진이나 부안 등지에서 생산해 개경으로 나르던 화물선에 실려있던 것들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신상품이 아닌 이삿짐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침몰선 자체를 확인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침몰선을 발견할 때까지 추가 수중 발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고려시대 ‘태안반도 육로 관통’을 확인한다면 천수만과 가로림만 일대 화물을 내리고 싣던 항구가 어디였는지도 규명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태안에서는 굴포 운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당암포 청자의 존재로 태안반도에 얽힌 수운의 역사는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다. 우리 해양문화도 다채로워지고 있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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