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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의요정8_네마조네스의 불안[‘한국인의 좋은 습관’ 캠페인]
써니 | 승인 2018.04.20 11:54

8. 네마조네스의 불안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문지는 대학생이 되었다.

하교 길, 문지의 가방 안에서 요정들이 만났다. 네마조네스가 요정들을 호출한 것이다. 부키가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소피의 세계> 책에서 쓰윽 나왔다. 노타모레는 녹색의 전공 노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부키였다. 퉁명스럽게 네마조네스에게 물었다.

“ 왜 불렀어? 사이베르 생활은 어때?”
“ 뭐, 제 인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죠...ㅋ.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부키가 잽싸게 말을 끊었다.

“ 그럼 뭐해? 요정인데 날개가 없으니 벌거숭이 같은 걸. 게다가 눈동자의 0하고 1은 왜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거야? 핀란드 자작나무 숲의 요정들이 본다면 기겁할 걸.”
네마조네스가 화가 났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톡 쏘았다.

“ 대신 전 요정님들보다 빛처럼 빨라요. 그게 인간 세상을 얼마나 바꿨는지 알아요? ㅋㅋ
덕분에 세계인들이 서로 빛의 속도로 통한답니다.”

부키가 네마조네스의 빛처럼 빠르다는 말에 눈빛이 사나워졌다.
“ 빠른 만큼 엉터리에 거짓 정보도 많잖아. 사진 정보 거기에 무슨 논리와 개념이 있어. 생각하지 않는 자들의 벙어리 이미지지. 그게 다 페르푸메가 없어서 그렇다고. 우리가 움직일 때는 우리가 만든 페르푸메가 피어나. 그게 감정을 움직이지.”

네마조네스 얼굴이 찌푸려졌다. 부키가 강조한 우리가 만든 그 말에 자존심의 상처도 받는다. 네마조네스는 사실 인간들 기계능력에 무임승차한 것이다. 그리고 페르푸메를 버린 게 아니다. 잃어버린 것이다. 편리하고 속도감에 취해 어찌어찌 하다 보니 잃어버린 것이다. 사실 요즘 네마조네스는 자신이 무시했던 페르푸메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자존심을 접고 선배 요정들을 초대한 것이다. 네마조네스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두 요정에게 물었다.

“ 좋아요. 내가 잘못했다 치죠. 근데 어떻게 하면 페르푸메를 되찾을 수 있죠? 사이베르에서 사람들의 기억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아요. 게다가 비슷한 정보와 가져다붙인 듯한 같은 내용의 문구들이 너무 많고요. 상상력도 없어진 것 같고.”

7321김한 대표의 아이디어 노트. ©김한

세 요정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네마조네스 기대와는 달리 부키와 노타모레는 요즘 책과 노트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어서 네마조네스의 하소연조차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이때 문지가 가방을 열었다. 손을 뻗어 습관처럼 노트를 꺼내들었다. 노타모레가 눈을 쌩긋하더니 노트로 빨려 들어갔다. 세 요정의 이야기가 끊어졌다. 오늘은 문지가 소녀를 느티나무 옆에 행복한 표정으로 그렸다. 첫사랑 소년도 옆에 그려 넣었다. 그리다 보니 어린왕자인데 뭐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소녀를 살려내고 싶었다. 그 착한 마음을 읽은 노타모레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노트 속에 비추었다. 감귤 색 피부에 날개를 팔락대며 펜을 든 모습으로. 아주 짧은 노출이었지만 문지가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 어머, 너는 요정? 정말 있네.”

요정들은 문지의 반응에 웃기만 했다. 문지가 노트를 살폈지만 요정은 금세 사라졌다. 아무리 노트를 펄럭거려도 다시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가방 안의 두 요정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 페르푸메는 종이 세상에만 있는 거야. 종이는 어마어마한 틈이 있지. 그 틈은 우주라는 구멍이 별을 품듯이 정말 많은 것을 품어. 그걸 미미르의 틈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원천은 핀란드 신성한 자작나무 숲이지. 페르푸메는 눈에 보이지 않고 후각으로 느끼는 거야. 그래서 사이베르에선 페르푸메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직접 알 수는 없어.”

부키가 네마조네스에게 강조하자, 네마조네스가 신중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 그건 아직 이른 단정 아닐까요? 두 요정님은 페르푸메를 만들었잖아요. 마법 가루도 뿌렸고… 저라고 왜?”

네마조네스가 말끝을 흐리자 부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 사이베르는 우리도 실패했다고. 우리가 그곳에 왜 안 가는데...거긴 사막이야.”

네마조네스 눈빛에 0과 1이 마구 어지럽게 흘러내렸다. 네마조네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 알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페르푸메는 저도 사실 간절해요. 지금은 우리가 잘 나가도 저... 이런 기분은 뭘까요. 요즘 뭔가 불안하거든요.”

이 말들은 물론 가방 밖의 노타모레도 다 듣고 있었다. 네마조네스가 이제라도 페르푸메 이야기를 한 것은 정말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노타모레 귀가 영롱하게 빛났다. 그에 맞춰 문지의 노트에 그려진 소녀 얼굴도 영롱하게 빛이 났다. 문지의 눈에 이채가 다시 어렸다. 노타모레가 미소로 답하려는데 부키의 퉁명스런 반문이 노타모레 신경을 먼저 끌었다.

“ 뭐가 또? 전에도 노타모레가 노트북을 보고는 뭔가 불안하다고 하더니...그런 거야?”

“ 그거하고 비슷해요. 사이베르 다음엔 어떤 세상이 올지. 혹시 또 다른 요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말하자면 우리와는 아주 다른, 뭐랄까, 점점 기억을 흐리게 하거나…. 그런 요정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요정이라면 말이죠.”

네마조네스의 말에 부키가 날개를 파닥이면서 놀라서 물었다.

“ 네마조네스. 도대체 뭘 걱정하는 건데? 설마 괴물?”

“ 다음 세상, 거기다 또 다른 요정? 상상력이 지나친 거 아니야?”

네마조네스가 묘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 바이러스 알죠? 보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공룡도 죽여 버리는. 사이베르에도 바이러스가 있고 거기다가 버그가 있어요. 버그는 내부 시스템의 충돌 때문에 생기는 프로그램 괴물 같은 거죠. 저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바이러스는 모든 면역 유전자나 진화 코드를 지워버려요. 그럼 세상은 거꾸로 가게 되죠. 그 동안 세상은 쓰고 읽기만 했어요. 그런데 아닐 수도 있죠. 너무 차면 비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런데 나란 존재가 뭔가 다리인 거 같아요. 넘어갈 수도, 아님 뒤로 갈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다리 말이죠. 아니, 아니에요. 이건 기우일 거예요. 아, 제 말 잊어버리세요.…”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앤서니 브라운이 김한 대표에게 보내준 일러스트. ©김한

이 뜻밖의 말에 노타모레는 멍청해졌다.
‘ 바이러스라고? 차면 비운다고?’

노타모레는 금세 네마조네스의 불안을 알 것도 같았다.

‘ 그래. 1억년 이상을 지구에서 살았던 공룡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상에 사라진 문자가 얼마나 많아.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고. 그런데 그들이 사라져 버린 사실까지 지워버린다면?’

노타모레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전율했다.
이 만남 이후 세 요정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논객닷컴=써니]  

<노트의요정 시리즈 전체보기>   김한, 7321디자인, 황인선 

써니  news34567@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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