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완의 애, 쎄이!]

[오피니언타임스=우디] 지원동기에 쓸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다지 직장인이 되고 싶지 않았고 한 때는 프리터족(프리아르바이터)을 꿈꾸기도 했다. 여러 군데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출퇴근 하는 삶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오늘 한 일을 내일도 똑같이 하는 것이 너무나 무료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더군다나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지금 같은 때에 살기 위해서 돈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대학교 1,2학년 때는 꿈에 부풀어서 ‘영원히 일하지 않고 글만 쓸 거야’, ‘고흐 같은 예술가로 남을 거야’라는 의지를 불태웠다.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고 집안에서 슬슬 압박이 올 때쯤에야 나는 ‘돈’의 중요성과 ‘노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 동기는 써지지 않았다. 성장 과정이나 가치관이나. 특히 500자 이내로 예시까지 곁들여서 가치관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돈을 벌려고. 돈을 주세요. 돈을 벌 거예요. 돈돈돈. 돈을 주시면 열심히 구르겠습니다.’ 이런 말들로 지원동기 채워놓고 방바닥에 벌러덩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저 말들을 어떻게 포장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냥 쓰기로 했다. “저는 취업준비를 하면서 제 능력이 무가치 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현재 제 필력이 곧장 이윤으로 닿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저의 필력으로 회사에서 이윤을 만들어내겠습니다”라고. 친구들은 내 지원 동기를 보고 너무 패기 없어 보이고 자조적이라고 말했다. ‘저 정도도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한건데! 자조적이라니!’ 취업 준비 기간의 나의 자존감은 어마어마한 깊이로 떨어지고 처박히고 부서져있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취업이 되었다. 직장인이 된 것이다.

©픽사베이

첫 출근 날짜를 받고서는 너무 떨려서 잠을 못 잤다. 혹시 이상한 회사면 어떡하지, 출근했는데 집에 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동명이인인데 잘못 연락이 왔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회사는 좋은 곳이었다.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로 오랜만에 재밌는 일주일을 보냈다. 아는 것이 없어서 회사에서 선배들에게 물어보기만 한 날도 있었고, 들었던 지시사항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새로워서 즐거웠다.

말만 들어봤던 지옥철도 타보고 회사 메일 계정도 만들고 명함도 생겼다. 명함을 받은 날에는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있는 내 이름이 낯설었다. 이게 내 이름이 맞나, 다른 사람 이름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상 앞에 명함을 세워두고 출근할 때 한 번 집에 돌아와서 한 번씩 쳐다보았다. 내 명함을 내가 낯설어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면 이상한 불안감이 찾아왔다. “나를 자르면 어떡하지?”라고.

내가 아는 회사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게 사람을 퇴사시켰다. 어느 날 내가 맡고 있던 거래처 사람이 나 말고 다른 이를 찾았고,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다면서 연봉협상을 미뤘다. 생일마다 챙겨주던 커피쿠폰을 주지 않기 시작했고, 회사가 힘든 때이니 다 같이 ‘으쌰으쌰’하자며 연차신청서를 제출하고 회사로 출근하라고 했다. 그렇게 이전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나는 일을 배우는 것이 너무 재밌어서 ‘이 일을 나한테서 뺏으면 어떡하지’ 그런 막연한 걱정을 하다가 ‘나를 내보내려는 시도들이 눈에 보이면 너무 슬플 거야’라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버려지고, 비틀거렸고, 사회중심부에서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 낭떠러지를 등 뒤에 두고 있었다. 서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지쳐있었다. 이 사회 안에서 나의 자리라는 것, 나의 책상을 둘 곳을 온전히 가져보지 못했다. 접이식의자를 들고 빈틈이 생기면 얼른 엉덩이를 붙였다가 나를 밀어내는 힘이 느껴지면 터덜터덜 걸어서 사회 가장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런 불안이 익숙했다.

취업을 하고 오랜만에 학교 선배들에게 연락을 했다. 고생했다, 진짜. 나에게 그렇게 말해줬다. 취업에 먼저 성공한 선배들 친구들이 하나 같이 말했다.

“취준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야. 하는 것 없이 절망적인 때야” 그러면서 헛헛하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버텨야지. 버텨야 해”라고.

사회에 나오고 나는 “요새 진짜 취업이 힘든가요? 실업난이 맞아요?” 라는 질문을 꽤 여러 번 받았다. 취업 준비를 하는 나이 대이기때문인지, 최저시급 파트타이머를 지원해도 20군데가 넘는 곳에서 떨어졌었다. 월급을 받는 회사에 이력서를 내려고 하니 암묵적으로 어학점수와 자격증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물가는 계속 올라가는데 그에 비해 임금은 오르지 않고 개인이 짊어져야하는 짐의 무게가 커져갔다. 낭떠러지 아래는 무의 공간이었다. 안전망은 없었다.

사회에서 오랜 시간 견뎌온 어른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는 삶이나 저녁이 없는 삶, 회사에 무조건적인 충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생인 우린 조금 달랐다. 퇴근을 하고 영화를 보고 싶고 운동을 하고 싶었다. 내 아이의 입학식과 학예회는 가고 싶었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싶었다. 1년에 한번은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그 정도의 부와 안정과 여유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요구하면 사회에 들어설 수 없었다. 이런 여유가 없는 일자리는 넘쳐났다. 원하는 삶이 있는 일자리로 수많은 청년들이 몰려서 취업난인 것이다. 그래, 그런가보다. 이런 말들을 나에게 질문을 한 어른들에게 전하진 못했다. 그냥. 취업하기 힘들죠, 하고 설핏 웃었다.

 우디

글을 읽고 영화 보고
여행 갈 돈을 차곡차곡 벌고 있는 쌀벌레 직장인
소비자가만드는신문 기자

전직 청년백수 쌀벌레 글쟁이
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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