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공모전 가작]

[오피니언타임스=이주호] 휴학을 하고 여행을 다니던 중,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빠져 민박 스테프로 몇 달을 머물렀다. 민박 일에 익숙해지던 중 젊은 부부가 체크인 했다. 여권을 확인하니 삼십 대 중반이다. 2인실을 드렸다. 아직 신혼인 것 같다. 다음 날 조식에서 만난 둘은 아침부터 알콩달콩 했다.

싱거운 하루를 보내고 혼자 저녁을 먹을 때쯤, 부부가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때마침 부부도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 왔다. 우리 민박에 식탁은 한 개뿐이다. 나는 내 저녁거리를 차리고 부부는 장 봐온 물건들을 꺼내어 저녁을 함께했다. 나는 내가 차린 음식을 권했고, 부부도 나에게 음식을 권했다. 훈훈함이 오갔다.

사람들은 20대 청년이 스테프로 일하는 거에 관심을 갖는다. 한국 사회란 모름지기 단계별로 밟아야 하는 코스가 정해져있는데 “베네치아 한인 민박 스테프”는 예외라 보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못 참는 손님들은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됐는지 물어온다.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그 질문은 초면인 투숙객들과 가볍게 이야기하기 좋은 주제다. 나는 녹음된 자동응답기처럼 짧게 대답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술병은 비워져 갔다. 불콰해진 얼굴의 남편은 이번엔 학교를 물어왔다. 나는 어디 학교를 다닌다고 대답했다. 다음은 전공을 물어왔다. 경영학과라고 대답했다.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진로는 어느 쪽으로 생각 중이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공식적이었던 질문들은 점점 개인적인 질문들로 바뀌어 왔다. 첫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이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였으면 대화가 더 일찍 끝났을까.

©픽사베이

과는 어떻게 바꾸고 앞으로 이쪽 진로로 공부해서 밥벌이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 대화가 끝나면 좋았을걸. 남자는 세계 경제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직종의 불투명한 미래와 불안정성 그리고 관련 회사들의 최근 주가 동향까지 읊어줬다. 물론 그 주식은 하락세였다.

또한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중국어의 중요성과 복수전공을 생각해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 그리고 이공계의 중요성(이 제안은 정말 당황스러웠다)에 대해 교훈을 들었다. 그는 몇 가지 자신이 확신하는 신념들로 25년 동안 내가 살아온 삶을 손쉽게 평가했다.

대화에서 한 번 운전대를 잡은 그는 폭주기관차였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전환해도 곧 주제는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로 넘어갔고, 독일 맥주가 맛있다는 얘기는 독일 자동차 엔진의 통시적 발달사로 옮겨갔다. (그의 전공이었다.)

이야기는 길을 잃고, 그는 대화의 나르시즘에 빠진듯해 보였다. 그나마 폭주기관차의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내가 대화를 궤도에 위치하려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남자는 태만한 20대 청년에게 현실을 일러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듯했다. 그 뒤로 30분은 더 연설을 하고 난 후에야 그는 개운한 듯 방으로 올라갔다. 오늘 저녁은 숙면을 취하겠지.

조금 삐뚤어진 내 성격은 비꼬는 데 최적화됐지만, 민박집 후기를 위해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했다. 자본주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표정이 기관차의 동력이었던 것 같다.

세계경제의 흐름을 읽고, 한국 부동산 시장을 읽으며, 과학 서적을 읽는다는 사람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 표정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거는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 줄 몰라야 꼰대다. 그는 어디선가, 또 다른 교육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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