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말머리]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표현 뒤에는 흔히 부정적인 술어가 동원되곤 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배워왔다. 이유도 모른 채 ‘표리부동은 부정적 표현’이라고 학습했다.

실제 용법도 그렇다. 포털 뉴스 검색에 표리부동을 검색해보면, 보통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의도로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첨예한 갈등 상황이 반복되는 정치 관련 기사에서 이 사자성어를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그 쓰임이 어떻든 간에 표리부동의 한자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딱히 나쁠 것도 없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겉(表)과 속(裏)이 같지 않은(不同) 게 뭐 대수인가. 외려 더 매력이 있는 경우도 있지 않나? 반면 외유내강(外柔內剛)은 대개 긍정적인 뜻으로 쓰인다. 겉은 부드러워 보이는데, 속은 굳세다는 것. 이 역시 겉과 속이 다른 게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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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표리부동한 사람이 참 좋다. 겉으로는 평범한 대기업 직원이지만, 속으로는 조금 철이 없어 보일지언정 예술가적 고뇌를 가득 안고 사는 박 모 사원. 다소 보수적인 직장에서 제복에 가까울 정도의 옷차림과 정갈한 머리스타일로 출근을 하지만, 주말에는 웬만한 남성 동료보다 더 거친 운동에 빠져 지내는 서 모 대리. 겉 보기엔 강한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장남이지만, 쉬는 날에는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밑줄 쳐가며 읽는 영원한 문학청년 이 모 팀장.

다른 ‘속’이 있어야 ‘겉’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다. ‘속’마저 ‘겉’과 진배없어지면, ‘겉’이든 ‘속’이든 금세 지쳐 버리기 십상이다. 더 다양한 ‘속’을 발굴해내자. 회사에서, 학교에서,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지친 하루를 보낸 ‘겉’을 위무해줄 수 있는 건 내 안의 또 다른 자아인 ‘속’이다.

표리부동한 자신을 자책하지 말자. 도리어 ‘표’와 ‘리’의 차이를 더 벌려 보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잠재한 다채로운 자아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 보길 권한다.

치자(治者) 입장에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선호한다. 그래야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데 겉과 다른 나의 속에 대해 누군가에게 소상히 설명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없다. 이 내밀함이 전제될 때 나의 속은 더욱 건강해지기 마련이다.

표리부동한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겉과 다른 그 속이 불법적이거나 비도적이어서는 당연히 안 되겠지만, 여러 얼굴을 갖고 있는 내 안의 또 다른 영혼에게도 숨 쉴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또 표리부동하다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이 한 말을 입장에 따라 뒤집는 행태는 겉과 속이 다르다기보다는, 그저 그 행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 상응하는 비난을 받으면 된다.

표리부동은 때때로 창의력의 원천이 될 수 있고, 동기부여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의 또 다른 속이 참으로 소중하다. 오늘도 표리부동한 내일을 꿈꾼다.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석혜탁

대학 졸업 후 방송사 기자로 합격. 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대학 연극부 시절의 대사를 아직도 온존히 기억하는 (‘마음만큼은’) 낭만주의자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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