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공모전 가작]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춘수는 시 <꽃>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의 첫 만남에선 늘 서로의 이름을 물어본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된다 해서 모든 이름이 불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름은 그저 하나의 몸짓으로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이름은 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몸짓으로 변하기도 한다. 내 이름 또한 누군가에겐 오래도록 부르는 이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스쳐지나간 이름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픽사베이

개인적인 경험을 빌어 얘기해보겠다. 첫 번째 경험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겪었던 일이다. 철학 수업을 맡으신 선생님께서 4월의 어느 날 교실에 들어와 무겁게 입을 뗐다. 그리고 수업 진행에 대해 짤막하게 안내한 뒤 단원고 학생들의 출석을 부르셨다. 그렇다. 그 날은 세월호가 침몰하고 2년이 지난 날이었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나가자 교실에선 한두 명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슬퍼서 눈물을 흘렸는데, 이름을 불렀다는 것만으로 눈물이 흐르는 이유를 당시엔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경험은 21살, 얼마 전의 경험이다. 친구와 함께 물류센터에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 곳은 상자가 가득 쌓여있었고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었지만, 며칠 일하다보면 서로 얼굴을 익힐 수 있는 인원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는 ‘아가’라고 불렸다. 아르바이트를 한 지 2주가 넘어갈 무렵부턴 불편함을 느꼈다.

이름은 단어와 같다. 쓰이지 않으면 의미를 읽고 곧 생명을 잃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름은 생명력을 얻는다. 하지만 세상엔 너무나 많은 이름이 존재한다. 그 모든 이름은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이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이름이 모여 있는 곳에선 하나하나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익명이 된다. 익명 속에서 나는 특별히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는, 그저 수많은 사람 중 행인 1에 불과하다. 하지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수많은 익명 사이에서 나는 ‘내’가 된다. 김춘수가 노래하듯, ‘하나의 몸짓’이 ‘꽃’이 되는 순간이다.

19살의 나는 어쩌면 이름의 힘을 인지하진 못했지만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며 말씀하신 덕에 은연중에 느꼈을지도 모른다. 당시 눈물이 나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서도 내내 울었으니 말이다. 출석을 부른다. 이는 그저 나열된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다. 명단에 적힌 학생이 잘 있는가 한 명씩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다양한 꿈을 그리던 학생들은 참사 이후 세월호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되곤 했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며 단원고 학생들을 ‘세월호와 관련된 사람’이 아닌 대한민국 수많은 학생 중 하나로 대하셨다 생각한다. 그 덕에 나도 그들을 학생으로 바라보고 눈물을 흘린 게 아닐까.

물류센터에서 느낀 불편함의 근원은 호칭에 있었다. 초반엔 이름 외우기 어렵구나 하고 넘긴 ‘아가’라는 호칭이었지만 2주가 지나고 충분히 이름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가라고 불리면서 느낀 불편함이었던 것이다. 몇 주 있다 떠날 아르바이트생 몇 명이기 때문이었을지, 그저 이름에 별 신경을 안 썼기 때문인지, 그저 그 호칭이 편해서 불렀는지, 혹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중요했던 건 아르바이트생들은 물류센터에서 아가라고 불렸고 그 호칭에는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 지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의 위치, ‘직원들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근무시간을 보내지만 이젠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흔한 아르바이트생 1’ 정도.

사실 이해는 간다. 물류센터에서 한 번 아르바이트 한 뒤 다시 일하러 오는 애들은 많지 않을 테니 굳이 이름을 외울 필요가 없을 것이고_ 직원들이 그 곳에서 몇 번 아르바이트 했던 내 친구를 기억하고 있던 것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_ 아르바이트생들이 직원들 보다 나이도 어리니 아가라고 부르는 게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편했던 것은 아마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 이름을 외우시던 선생님들과 모든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려 노력하고 한 번이라도 더 부르려 하시던 선생님들이 계셨고, 이름을 외우고 부르던 모습에서 그 분들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존중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부르기까지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또는 호감이 있어야 하는 행동이고, 그 관심과 호감은 대중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누군가에겐 의미 있는 ‘나’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을까. 또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과 호감을 받고 살아왔을까.

아, 오랜 친구가 떠오른다. 조용히 친구의 이름에 애정을 담뿍 담아 입에 담아본다. [오피니언타임스=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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