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좋은 습관’ 캠페인]

이제 부키와 노타모레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이 속도와 기운이라면 곧 책과 노트 아날로그의 세상에도 침투해 들어올 게 분명했다. 아날로그와 사이베르는 쉽게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만일 유모리몬이 인간 세계로 온다면 그들의 침투대상은 책과 노트가 체계적으로 분류된 세계 최대 대도서관의 아카이브 망일 것이다. 아카이브를 움직이는 설계도가 알고리즘이었다.

‘아카이브 망의 설계도인 알고리즘이 교란된다면? 오 그럼, 우리의 기억과 기록은?’

문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우디의 이야기는 다소 황당했지만 그럼에도 문지의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 있었다. 문지가 잃어버린 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학생 때 문지는 글과 상상으로 살고 싶다고 할 만큼 책과 노트를 가까이 했다.

‘ 그런데, 지금은......’

안부를 묻는 손 편지는 전자메일로 대체되다가 이제는 몇 바이트의 짧은 핸드폰 문자로 바뀌었다. 고마움 미안함 즐거움 감정 표현은 스티커와 사진으로 바뀌었다. 우디를 낳고 문지가 쓴 노트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기록하는 습관만이 아니었다. 나이 탓으로 돌렸지만 대학교 때는 줄줄 외우던 시는 물론 생일과 주소까지 외웠던 친구들의 인적사항은 이제 기억이 잘 안 났다. 메모리를 저장하면 되지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계의 메모리는 결코 인간의 메모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어느 샌가 머릿속과 가슴은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기록이 없으면 기억은 퇴화되고 기억이 퇴화되면 감정도 미약해질 것이다.

‘내가 성식을 처음 만난 날이 언제였지? 그때 걔가 무슨 책을 보고 있었더라? 우디를 낳은 병원 호실은? 여학생 때 친구들 이름은? 사막의 샘 이름은? 안네의 얼굴이...아, 안 떠올라?’

우디의 노트는 노트 속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이었다.

‘미미르가 우디에게로 옮겨간 걸까?’
문지가 황급히 노트 속으로 들어갔다.

©픽사베이

요정들과 유모리몬 세력과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다. 오랫동안 평화 상태에 있던 요정들은 싸움에는 너무 무력했다. 네마조네스는 스스로 한 예상이 실제로 일어나 겁에 질려 있었다. 유모리몬에게는 세 개의 비밀병기가 있었다. 하나가 인간 하케르 군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이베르에 묘한 향 델레테(Delete)였다. 무색무취 델레테는 달콤한 콘비니언스 복합향이라 페르푸메보다 몇 배 강력했다. 이 향을 쐬면 기계는 알고리즘이 엉클어지고 사람들은 기억력이 줄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기억과 기록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범죄자도 다수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우겼다. 유모리몬과 김 박사가 주장한 것처럼 완벽한 델레테라면 거짓만을 가려냈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델레테는 불완전한 향이었다. 부작용이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델레테에 취해 눈동자가 초점이 안 잡히고 심지어 눈동자가 없어진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그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고 자부심이 넘쳤다. 부끄러움, 성찰 이런 것은 관심에도 없었다. 그들의 눈을 감추려 선글라스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심지어 하케르 코스프레까지 유행이었다. 그들은 심장보다 위장을 더 챙겼고 의미보다는 재미를 찾았다. 글은 사진과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그들은 사진을 올리고는 금세 잊고는 다른 사진을 정신없이 찍었다. 그들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그들을 찍는 것만 같았다.

델레테는 급기야 사이베르를 넘어 책의 세계까지 흘러들어 대도서관 아카이브를 교란했다. 오래 전부터 책의 분류와 관리는 아날로그보다는 사이베르에서 디지털 시스템으로 교체되었었기에 더 위험했다. 이쯤 되자 부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불똥이 자신에게 떨어진 것이다. 허세를 부리며 자책하는 척 관망만 할 수가 없었다. 부키만큼은 아니었지만 노타모레도 이런 상황이 큰 충격이었다. 노타모레는 원래 비어 있는 책이므로 유모리몬이 공격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은 부키와 연결된 운명이었다.

‘모든 게 기록 청소로 지워지면 인간에게는 남는 게 없을 것이다. 인간들의 저 멍한 눈동자... 그건 아주 위험한 신호야.’

페르푸메가 온 몸에서 진하게 배어나오고 미미르처럼 깊은 눈을 가진 문지는 세상의 이런 불길한 변화를 먼저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마을 도서관 사서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의아해 했다. 그 사서는 잘못된 책을 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고개를 박은 채 무엇인가를 누르고 있었는데 가끔 그들이 고개를 쳐들면 눈동자가 탁하고 흐릿했다. <눈 먼 자들의 도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 불길하게 떠올랐다. 무서웠다. 막 9살이 된 아들 우디도 변한 것 같았다. 학교를 다니지만 정작 책을 읽지 않았고, 그림 노트도 하지 않았다. 게임에 빠져 아침만 되면 눈동자도 흐릿했다. 자기 전에 밤마다 읽어주던 동화도 듣고 싶지 않아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오지로 사진 작업을 떠난 아빠에 대한 기억도 잊어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뭔가가 새어나가고 있어.’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문조차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놀라운 신기술에 호기심과 관심을 빼앗겼다. 이것이 유모리몬의 세 번째 비밀병기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기심 말이다. 사람들은 생체 칩 기억, 가상현실, 인공지능, 이미지 복제의 속도와 화소에 더 열광했다. 문지는 생각했다.

‘기록부터 사람의 기억까지 기계에만 의존해도 되는 걸까?’

문지가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기억은 무뎌지고 기록은 더 빠르게 지워져갔다. 요정들은 허무함에 빠졌고,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페르푸메 수호 요정인 부키와 노타모레는 그래도 위대한 기억의 나무와 핀란드 자작나무 숲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아직 희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그러나 사이베르 기억 세계에 잔존한 네마조네스는 실의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노타모레가 네마조네스를 찾아갔다. 네마조네스는 최근 눈에 띄게 오작동을 일으키는 교통신호등 통제 시스템에 숨어 있었다. 네마조네스가 노타모레를 보고 외면을 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여기 이 신호 오작동으로 여럿이 죽었어요. 그들에게 사과하는 중이에요.”
노타모레가 그런 네마조네스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네마조네스! 페르푸메를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었어. 그렇지 않아?”
네마조네스가 팩 고개를 돌렸다. 숫자들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날렸다.

“네 탓 만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보고 어떡하라고...”

노타모레는 그런 네마조네스를 가만히 보았다. 네마조네스는 노타모레 유선 눈에 “다시 시작하자.”라는 글을 보았다. 노타모레가 교통신호등이 향한 사거리를 보면서 혼자에게 말하듯 말했다.

“페르푸메가 역사의 에센스였던 거야. 위대한 기억의 나무여, 어쩌면 좋죠? 기억이 지워진 세상을 어떻게 해야 하죠? 이젠 답을 주셔야 할 때입니다”라고 간절하게 기원했다. 네마조네스는 그런 기원이 뜻밖이었다.

‘이젠 답을.... 그럼 아직 희망이?’
그런 노타모레를 보면서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노타모레가 사랑하는 아날로그 노트는 아직 유모리몬과 하케르가 침투하기 힘들다. 거기는 알고리즘이 없어. 유모리몬은 알고리즘을 타고 움직이거든. 그렇다면 노타모레에게 뭔가 희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노트의요정 시리즈 전체보기>  김한, 7321디자인, 황인선, 노트의요정, 오피니언타임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