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후회’라는 단어가 계속 마음에 머문다. 두 음절로 이루어진 이 단어엔 자음 ㅎ이 한 음절에 하나씩 두 개 들어있다. ㅎ은 한글 자음 열네 개 중 가장 마지막에 온다. 시작하고 겪고 지나가고 그리고 마지막에 오는 게 ㅎ이다.

후회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아프다. 그래서 괴롭다. 그래서 무섭다.

©픽사베이

비슷한 류의 소식을 반복해서 듣게 되는 어떤 시기가 있다. 시차를 두고 띄엄띄엄 뜸하게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모았다가 동시에 전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듣게 되는 어떤 시기가 있다. 소식을 전하는 이들은 서로 친분이 없는 사이, 말 그대로 남남이다. 그런데 내가 듣게 되는 그들의 소식은 친지나 형제가 아닐까 생각될 만큼 같은 일정, 같은 계획을 전한다.

지금이 내겐 그렇다. 천지가 따뜻하게 데워지고 꽃향기 새싹 향기로 그늘조차 환한 봄이어서 일까? 가깝게 지내는 후배부터 그냥 목례 정도 하는 사이인 이웃, 먼 곳에 사는 친구와 일로 알게 된 지인까지 한결같이 전하는 소식.

부모님 모시고 형제들과 여행 갈 거라는, 혹은 다녀왔다는 계획 아니면 후일담이 그것이다. 번거롭고 시간 내기도 팍팍하다고, 늘 전화하고 걸핏하면 모이는데 여행까지 가려니 난리도 이런 난리는 없다는 말로 그들의 소식 전하기는 끝난다.

세상이 다시 텅! 빈다. 너무 비어서 숨만 쉬어도 내 숨에 내가 흔들린다. 이 봄, 침 한 방울도 바삭거리며 부서질 만큼 가슴이 갈라 터진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로, 잘 했다는 부추김으로 그들이 전하는 소식에 청취자로서의 예의와 도리는 잊지 않는다. 하지만 속울음이 쌓이는 건, 그 울음 속에 나 홀로 서 있는 쓸쓸한 세상 하나 들어차는 건 어떻게도 밀어낼 재간이 없다. 내겐 애당초 없었거나 이젠 없는 형제와 부모. 그래서 나로선 절대로 불가능한 그들과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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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에 결혼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 서울로 왔다. 멀리 서울과 대구에 떨어져 살며 아이 낳고 키우느라 명절을 포함해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어머니를 봤다. 결혼 십육 년차에 어머니가 쓰러졌다. 그리고 십육 년, 어머니는 정신은 맑지만 왼쪽 수족이 불편한 환자로, 형제 없는 무남독녀인 나는 그런 어머니의 유일한 보호자로,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외로운 유성처럼 살았다. 재작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결국, 나는 어머니와 그 흔한 꽃구경 한 번 못 가본 딸이 되고 말았다.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미지의 세상을 보는 여행은커녕 어머니를 태우고 서울 시내 고궁도 한 번 못 가본 딸이 되고 말았다.

병원 입원실 창으로 만개한 꽃과 땅의 그늘을 넓히는 풍성한 버드나무를 보며 봄을 봤다고 느꼈다. 에어컨을 틀어도 땀이 맺히던 같은 병실의 환자들을 보며 여름을 맞았다고 느꼈다. 구름이 유난히도 맑은 하늘과 조금씩 색이 바래가는 창 밖 거리의 가로수들을 보며 가을이 왔다고 말했다. 다 털어지지 않은 눈 덮인 외투로 들어서며 겨울이 깊다고 어머니의 동감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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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에 모셨다가 서울의 요양병원으로 옮겨, 돌아가실 때까지 어느 집 시집 간 딸들보다도 더 자주 어머니를 보고 함께 한 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고백한다. 나는 긴 병환 중의 어머니를 지키고 연명시키기에 온 시간과 정신을 쏟았다. 어머니를 살아계시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십육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수만 번을 굳은 콘크리트보다도 더 강하고 끈질기게 내 모든 사고를 지배했다. 당연히 그 외의 어떤 것도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한동안은 그래, 그랬다. 어머니를 부축해줄 형제가 하나만 있으면, 어머니를 붙잡고 아름다운 풍경 아래 서 있으면 사진 찍어줄 형제가 하나만 있으면, 어머니를 두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어머니를 믿고 맡길 수 있는 형제가 하나만 있으면, 숨 한 번 쉬면 돌아오는 어머니를 지켜내는 경비를 의논할 형제가 하나만 있으면, 아니 그 어떤 것도 아니어도 좋으니 ‘우리 엄마’라고 부르는 또 한 사람이 있어 심신이 약해진 어머니 앞에서 함께 너스레를 떨며 어머니를 웃게 할 형제가 하나만 있으면... 산도 들도 바다도 해외인들 못 갔으랴. 그렇게 내게 형제가 없다는 것에 그 모든 아쉬움을 억지로라도 이겨보려 했다.

그렇게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병실에서 창으로만 사계를 보며 그것도 우리 모녀가 함께 보는 세상이라고, 이 또한 어머니와 내가 함께 하는 시간이라고, 나 자신을 억지 충족시켰던 이 세상에 이제는 어머니가 없다.

요양원에 계실 때나, 서울의 요양병원으로 옮겨 오셔서나, 정기 검사나 갑작스러운 위중함에 어머니가 급성기 종합병원으로 이송될 때는 많았다. 그때마다 먼 거리가 아닌데도 차에 타는 걸 불편해하셨던 어머니만 생각했다.

병실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와 차에 옮겨 타실 때도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나 혼자선 불가능한 어머니의 이동 경로. 누구보다도 자존감이 높던 어머니는 허약하고 비쩍 마른 딸이 힘들어하는 걸 무엇보다 애타하셨다. 당연히 그 마음속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존심의 상처 또한 컸을 것이다. 그래서라고 나는 긴 세월 자위했었다. 세상 사람들 전부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여행은 어머니를 더 슬프게 하고, 딸인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시는 어머니를 더 미안하게 하는 거라고. 그래서 나는 시도할 수도, 실행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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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로 여행 갈 계획을 알리는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자식들 돈 든다고 거절하셨던 어머니가 자식들이 거듭 청하자 은근히 좋아하시는 것 같다는 말로 후배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고도 핸드폰을 쥔 채로 한참을 거실을 서성이다가 결국 어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엄마’를 불러본다. 나름대로는 뒤에 남겨질 후회가 두렵고 겁나서 조금이라도 그 부피를 줄이려고 어머니의 병중 십육 년을 최선을 다하려 발버둥 쳤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후회’라는 두꺼운 장막이 어머니 사진 앞에 선 내 마음에 켜켜이 쳐진다.

“엄마, 나는 엄마를 죽으로, 주사와 약으로, 연명하시게만 해 드렸지 품고 가실 추억 하나 못 만들어 드린 참 못난 딸이네요. 가까운데 드라이브 가자고 말이라도 드려볼 걸, 갯벌 생생한 내음 맡게 해 드릴 바다는 못 가도 엎어지면 코 닿을 한강 둔치라도 엄마를 태우고 다녀올 걸, 이름 난 명산은 멀어서 못 가도 가까운 동네 얕은 산 산책로라도 휠체어에 탄 엄마 밀며 이런저런 얘기 들려드릴 걸, 그랬다면 요즘처럼 사람들이 자기 부모랑 여행 간다고 할 때, 먼 곳은 아니지만 나도 엄마랑 어디어디 다녔다고 말하며 그때 본 엄마의 표정과 눈빛을 기억해낼 텐데...”

후회는 왜 늘 나중에 오는가. 왜 먼저 오는 법이 없는가. 그리움은 왜 늘 사라지고야 그 속내를 드러내는가. 간절함은 왜 늘 잃고서야 확산에 가속이 붙는가.

딸들과 여행을 떠나게 될 후배의 어머니에게, 좋은 추억으로 꽉 차 오시라는 인사와 함께 많진 않지만 노자를 챙겨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작은 관심과 정성이 사랑하는 후배의 어머니께 추억의 귀퉁이라도 따뜻하게 데워드릴 수 있다면, 훗날 어머니를 추억하는 후배의 마음 또한 덜 춥지 않을까 해서다.

서석화

시인, 소설가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종이 슬리퍼> /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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