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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슬픔을 대신 걸러준 곡비, 전옥(全玉)[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이동순 | 승인 2018.05.04 12:28

[논객닷컴=이동순] 1950년대 대구에는 제법 이름 있는 극장들이 있었습니다. 1903년 일본인이 세운 금좌(錦座)를 필두로 해서 유일하게 민족자본으로 건립되었다는 만경관(萬頃館, 1921), 나중에 대구극장이 되었던 조선관(朝鮮館, 1922), 향촌동의 대경관(大慶館), 송죽극장이 된 신흥관(新興館), 자유극장으로 이름이 바뀐 영락관(領樂館), 한일극장으로 바뀐 키네마(1938) 등 유명한 극장들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 휴전 직후 10세 미만의 소년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극장 구경을 더러 다녔습니다. 이재필이라는 한국인에 의해 세워졌다는 극장인 만경관(萬頃館)도 갔었고, 대구극장에도 갔었습니다. 아버지가 즐겨 찾던 극장의 프로그램은 주로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영화였습니다. 전쟁 직후의 고달픈 시절이 워낙 삶의 고통을 겪게 하였고, 아무런 희망이 없던 슬픔의 세월이라 무엇보다도 비극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 제작기법이나 기술이 크게 발전된 시기가 아니어서 권선징악이나 벽사진경(辟邪進慶)으로 귀결되는 판에 박힌 줄거리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이 워낙 고난과 역경의 과정이라 비극영화를 한편 관람하는 시간은 그때만큼이라도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을 어느 정도나마 덜어내는 유일한 카타르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극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앞은 항상 인산인해로 넘쳐났습니다. ‘목포의 눈물’, ‘눈 나리는 밤’ ‘가는 봄 오는 봄’ 따위의 영화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타이틀로 기억됩니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비극영화의 대부분에서 단골배역을 도맡았던 한 배우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옥(全玉, 1911~1969)입니다.

배우 전옥 ©이동순
대구 중심가에 있었던 송죽극장 ©이동순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영화 '목포의눈물'을 보러 가던 길에(1956) ©이동순

여러분은 혹시 곡비(哭婢)란 역할을 아시는지요?

예전 양반가문에서 초상이 났을 때 상주(喪主)를 대신해서 슬픈 목소리로 구성지게도 울어대는 역할을 도맡아 하던 여인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곡비는 유난히 곡(哭)을 잘 해서 문상객들은 이 곡비의 슬픈 울음만 듣고도 저절로 슬프게 따라 우는 효과를 자아내었다고 합니다. 남의 죽음을 대신 울어주며 문상객들의 울음을 이끌어내는 극적인 역할을 맡은 여인이었지요. 그러므로 곡비는 바로 배우였던 것입니다. 시인 문정희(文貞姬)의 시작품 중에 곡비의 슬픈 존재성을 다룬 것이 있습니다.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는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 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고 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 대는 곡(哭)소리에/ 이승에서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문정희의 시 ‘곡비(哭婢)’ 부분

영화배우 전옥은 1911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전덕례(全德禮)이지요.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게 되자 부모는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도리어 부모님을 설득해서 오빠 전두옥(全斗玉)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습니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극단 토월회(土月會)의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겨우 16세의 전옥은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일찍 발탁되어 토월회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배우 전덕례가 어느 날부터 오빠의 이름에서 가운데 글자를 뺀 ‘전옥’이란 이름을 예명으로 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배우의 이미지를 더욱 여성스럽게 만들었고, 게다가 다소 촌티가 느껴지는 것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25년 토월회 창립 2주년 기념공연으로 작품 ‘여직공 정옥’이 광무대에서 상연되던 어느 날 ‘여직공 정옥’에서 주인공으로 연기를 하던 석금성이 관객이 던진 사과에 배를 맞았습니다. 마침 임신 중이던 석금성은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황급히 전옥이 대역으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전옥의 역할로 공연은 성공적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날 공연 이후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극단이 경영난으로 해산하게 되자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연극무대를 떠나 영화 쪽으로 활동터전을 옮겼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성공의 기회가 꼭 한번은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전옥에게도 드디어 그러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화 장르였던가 봅니다. 전옥의 성공은 불세출의 대배우 나운규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나운규가 대본을 쓰고 각색과 감독, 주연까지 맡았던 영화 ‘잘 있거라’에 출연한 전옥은 돈에 팔려 부호에 시집가는 주인공 황순녀 배역을 능숙하게 잘 해냈습니다. 이 일로 전옥은 나운규에게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되었고, 선배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간판격 화형(花形:배우)이 되었습니다. 연이어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꿰어 차며 본격적 스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배우 전옥이 대표로 이끌던 백조가극단 공연 ‘눈나리는밤’, 악극 ‘항구의일야’에 출연한 배우 전옥, 1950년대 초반 백조가극단 부산공연에서의 ‘낙화유정’ ©이동순

1928년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를 겸하고 있었던 강홍식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때 전옥의 나이는 불과 17세였습니다.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일본이 식민지조선의 서울에 처음으로 건립한 경성방송국(JODK)에 나가 생방송으로 노래를 불렀고, 방송극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만큼 대중적 인기가 높았음을 말해줍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환(池斗煥)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로 옮겨갔습니다. 그녀는 극중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슬픈 독백으로 갑자기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극단에서는 비극의 적임자로는 전옥 뿐이라고 확신하며 모든 비극작품의 주역으로는 당연히 전옥을 등장시켰습니다. 워낙 비극배우 역을 잘 소화시켜서 그 무렵부터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1930년대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港口)의 일야(一夜)’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34년 남편 강홍식이 발표한 노래 ‘처녀총각’은 무려 10만장이라는 엄청난 분량이 팔리는 인기곡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범하던 일상인이 돌연 일확천금을 하게 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일입니다. 거기엔 반드시 악운(惡運)이 따르게 되지요. 벼락부자가 된 강홍식은 일본여자와 바람이 나서 기어이 가정을 박차고 떠나버렸습니다. 남편과 관련된 이야기는 흉흉한 소문만 되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강홍식은 결국 아내를 버리고 8·15해방 후 자기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전옥은 실의에 빠지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며 꿋꿋하게 살아갔습니다. 라미라가극단에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각색한 뮤지컬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뮤지컬을 공연했습니다. 뮤지컬 무대에서 인기를 얻게 되자 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영화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이 무렵 영화계는 조선총독부의 강압적 문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친일적 성향의 군국영화(軍國映畫)만 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지만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병정님’(1944)이 당시 그녀가 출연한 친일영화입니다. 제목만으로도 어떤 성향의 영화인지 단박에 짐작이 되지요?

1930년대의 배우들(왼쪽끝에서부터 강홍식 전옥 부부), 전옥의 첫 남편이었던 강홍식 ©이동순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전옥은 일제말 전국순회공연을 해오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이라 이름을 바꾸고 해방시기의 분위기에 적합한 새로운 뮤지컬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습니다. 배우로서의 삶보다 극단경영자로서의 새로운 재능이 놀랍게 꽃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되었고, 2부 버라이어티쇼에는 고복수, 황금심 같은 인기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악극단은 모든 면에서 으뜸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모두 전옥의 탁월한 경영능력과 감각, 재능 덕분이었지요.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생 출신 최일(崔一)과 재혼했습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가극을 떠나 영화 쪽으로 다시 관심을 바꾸게 됩니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 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 등을 영화로 만듭니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비극을 유난히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따라서 저는 1950년대 중반, 이 세편의 영화를 대구극장에서 모두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별로 떠오르지 않고 다만 주변관객들이 줄곧 흐느껴 울면서 코를 훌쩍이던 광경만 아련히 떠오를 뿐입니다.

1969년 10월 배우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가 불과 58세였습니다. 시대비극을 다룬 영화에 출연하여 수많은 관객들을 울리고 그들의 가슴 속 막힌 구멍을 뚫어주던 비극배우 전옥. 그녀의 삶은 이렇게 장엄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부모의 피와 재능을 이어받아 또다시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자, 어디 한번 보십시오. 남쪽의 배우 강효실과 북쪽의 배우 강효선은 바로 전옥과 강홍식 사이에서 태어난 자매입니다. 불운하게도 자매는 분단 때문에 두 지역으로 갈라져서 살다가 결국 서로 얼굴도 못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네요. 이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우 강효실은 인기배우 최무룡과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는 아들 최민수가 태어나서 배우가문의 대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최민수는 강홍식, 전옥의 외손자입니다. 하지만 강효실은 남편 최무룡과 이혼합니다. 전옥의 외손자 최민수는 강주은과 결혼해서 아들 최유성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자라서 또 배우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무려 4대째 영화배우 집안의 명성과 가문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일이 누가 일부러 시켜서 될 일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최무룡, 강효실 부부와 아들 최민수 ©이동순

다시 전옥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식민지시절 전옥은 영화의 선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제가나 관련되는 곡들을 가수로서 직접 부른 경우가 많습니다. ‘실연의 노래’(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천지방웅 편곡, 1934)는 1930년대 초반 당시 유행하던 풍조 중의 하나인 자유연애 사상을 한껏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말 못할 이 사정을 뉘게 말하며
안타까운 이 가슴 뉘게 보이나
넘어가는 저 달도 원망스러워
몸부림 이 한밤을 눈물로 새네

풀 언덕 마주앉아 부르던 노래
어스름한 달 아래 속살거린다
잊어야 할 눈물의 기억이던가
한 때의 한나절에 낮꿈이런가

상처진 옛 기억을 잊으려 하나
잠 못 자는 밤만이 깊어가누나
귀뚜라미 울음이 문틈에 드니
창포밭 옛 노래가 다시 그립다

-유행가 ‘실연의 노래’ 전문

전옥의 가요창법은 듣는 이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슬픔을 다시 불러일으켜서 그것을 결코 과장하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고 정리하여 심리적 안정감으로 다시 재조정시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전옥이 출연했던 다른 영화에서 시도된 방법과도 일치됩니다. 위에 인용한 ‘실연의 노래’만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상적 삶에서의 로맨스를 중심 테마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실연이라는 테마를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좌절과 비탄으로 빠져들지 않게 하고, 저급한 센티멘탈리즘으로 떨어지는 것도 극히 경계합니다.

전옥이 부른 또 다른 노래 ‘피지 못한 꿈’도 청년기 특유의 애잔한 심정을 잘 담아낸 노래입니다. 특히 2절 가사는 ‘네온사인 불 밑이라 피지 못한 꿈 피지 못한 꿈’이란 대목을 통해 식민지적 근대와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당시 청년기세대의 내적 고뇌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범오 유도순이 작사하고 외국 곡에 의탁하여 취입했던 노래 ‘가을에 보는 달’은 한숨, 서러움, 쌀쌀함 따위의 내면풍경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전옥 특유의 낭랑하고도 슬픔이 느껴지는 페이소스와 그것이 충만된 음색과 창법을 효과적으로 배합함으로써 1930년대 초반 좌절과 방황심리에 빠져들고 있었던 젊은이들의 심정을 일단 울리며 격려했던 것입니다.

원조 ‘눈물의 여왕’로 불리던 이경설(李景雪)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돼 바로 그 뒤를 이어서 제2대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러한 별명답게 전옥이 불렀던 대부분의 노래들은 거의 슬픔, 괴로움, 고달픔, 실연, 그리움, 고독, 비통함, 분노, 상처, 응어리 따위와 관련된 주제들이 많습니다. ‘울음의 벗’(이하윤 작사, 전기현 작곡)이란 가요작품이 지닌 내면적 총체성은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만으로도 전옥이 대중문화 쪽에서 지향해오던 방향성을 자연스럽게 환기시켜줍니다.

아, 나는 서러운 몸 폐허 위에서
떠오르는 옛 생각에 아 오늘도 우네

아, 나는 꿈을 따라 헤매이는 몸
상한 가삼 부여안고 아 이 밤을 새네

아 나는 외로운 몸 치밀어 오는
향수일내 한숨 지며 아 오늘도 우네

아 나는 울음의 벗 젊은 가삼에
눈물의 비 받으면서 아 이 밤을 새네

-‘울음의 벗’ 전문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전옥. 어릴적 모습부터 만년의 모습까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이동순

전옥이 남기고 있는 상당수의 가요작품들은 시인 유도순이 노랫말을 만든 곡들입니다. 작곡가로는 김준영과 호흡을 가장 잘 맞추었습니다. 작사가, 작곡가 두 사람은 전옥의 감성과 표현능력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그 효과에 잘 배합되는 작품을 능숙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리따운 처녀의 고운 자태를 묘사한 ‘첫사랑’(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과 ’수양버들‘(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 1936)의 가사에서 마치 혜원 신윤복이 그린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한 전통적 감각과 색조가 느껴지는 어휘구사도 돋보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전옥의 창법이 잘 소화시켜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전옥의 특징을 가장 잘 살려낸 최고의 걸작은 역시 악극 대본으로 구성한 ‘항구의 일야’가 아닌가 합니다. 영화와 뮤지컬 배우로서의 오랜 경험, 그리고 가수로서의 노련한 경력이 이런 걸작을 가능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으로는 사랑에 깊은 배신을 겪고 삶의 좌절로 이어지는 고통에 빠진 ‘탄심(彈心)’이란 인물입니다. 바로 이 배역을 전옥이 맡아서 크나큰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세상이 덧없으니 믿을 곳 없어
마음속 감춘 정을 그 누가 아랴 그 누가 아랴
-‘항구의 일야’ 삽입곡

탄심의 연인이었던 상대역으로는 이철이란 인물이 설정되었고, 탄심의 친구로 영숙과 의형제를 맺었던 박민이란 인물이 좌절 속에 빠진 탄심을 위기에서 구출해줍니다. 이 악극의 삽입곡을 원래 남일연이 취입했었는데, 해방 후 후배가수 이미자에 의해 재취입되어 LP음반으로 발매된 적이 있습니다. 이 음반을 통해서 듣는 전옥의 대사는 온갖 산전수전과 세상의 풍파를 다 겪은 노배우의 관록과 역량을 물씬 느끼게 하는 감동적 효과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전옥 이외의 다른 배역들로는 성우로 활동하던 남성우, 천선녀, 김영준 등이 맡았습니다.

세월은 많이도 흘러서 이젠 제1대 ‘눈물의 여왕’이었던 이경설은 물론이거니와, 제2대 ‘눈물의 여왕’으로 바위처럼 자리 잡고 있었던 전설적인 대배우 전옥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배우 전옥은 식민지의 억압과 유린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상처와 고통에 신음하던 당시 민중들의 가슴을 비통한 울음으로 쓰다듬고 위로하며, 민중들의 슬픔에 선뜻 동참하여 함께 공감하고 격려해주던 곡비(哭婢)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던 것입니다. 이 점이 배우 전옥의 위대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세월이 많이 흘러갔지만 우리가 지난 시기 우리의 대중문화사를 다시 더듬어 공부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망각의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요?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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