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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동 삼릉과 경애왕릉이 들려주는 후삼국 시대, 그리고 신라의 쇠망[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신라의 쇠퇴를 말해주는 왕릉의 변화와 포석정의 비극
김희태 이야기가있는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8.05.09 13:39

[논객닷컴=김희태] 경주의 서남산은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나정’을 비롯해 최초 신라의 궁궐인 ‘창림사지’와 ‘일성왕릉’, ‘포석정’ 등 다양한 역사 문화 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남산의 주요 등산 코스 중 한 곳인 ‘삼릉계곡’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세 기의 능인 ‘삼릉’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인데, 이 삼릉은 신라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삼릉의 인근에는 ‘경애왕릉’이 자리하고 있는데, 모두 박씨 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아달라왕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가 쇠퇴하던 시기의 왕이다.

남산에 자리한 배동 삼릉, 신라 박씨 왕의 능역으로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김희태
신라왕릉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원성왕릉, 삼릉과 경애왕릉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김희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무덤에 지나지 않지만, 삼릉과 경애왕릉은 후삼국 시대와 신라의 쇠망을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장소다. 또한 왕릉의 외형을 보면 십이지신상과 석물이 세워진 신라 중대의 화려했던 왕릉과 대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신라의 국력이 쇠퇴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진성여왕 이후 중앙의 구심점이 와해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야심을 가진 인물들이 난립했는데, 이 가운데 두각을 드러낸 이가 신라의 비장 출신으로 무진주에서 거병한 견훤과 경문왕 혹은 헌안왕의 서자로 알려진 궁예였다. 이들로 인해 우리 역사는 후삼국이라 부르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후삼국 시대의 시작과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신라

후삼국이 시작될 무렵 신라는 진성여왕의 양위를 통해 헌강왕의 서자인 김요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효공왕(재위 897~912)이다. 그러나 신라의 외부적인 환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어 영향력과 영토는 계속해서 줄어갔다. <삼국사기>에서 드러나듯 궁예와 견훤이 쳐들어와도 그저 성문을 닫고, 지키라는 소극적인 대응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구심점이 되어야 할 효공왕은 주색에 빠져 정치를 외면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대야성의 수비에 성공하며 경상도의 영향력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상황으로, 흔히 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후삼국의 지도는 이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경주 배반동에 자리한 효공왕릉, 효공왕이 재위할 당시 후삼국의 정립과 함께 신라는 수세에 몰리게 된다. ©김희태

이런 가운데 효공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조정 중신들의 추대로 박경휘가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신덕왕(재위 912~917)이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로, 탈해왕과 실성왕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사위가 된다는 것은 권력 집단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달라왕 이후 무려 728년 만에 박씨가 왕위에 오른 보기 드문 사례를 보여준다. 신덕왕의 재위 기간에 후삼국의 정립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신라를 적대시했던 태봉의 궁예(재위 901~918)와 호시탐탐 신라의 영토를 잠식해가는 후백제의 견훤(재위 892~935) 사이에서 신라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이후 신덕왕의 뒤를 이어 태자인 박승명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경명왕(재위 917~924)이다. 경명왕의 시대는 신라를 압박하던 태봉의 궁예가 정변을 통해 몰락하고, 그 자리에 왕건의 고려가 세워졌다. 궁예와 달리 왕건(고려 태조, 재위 918~943)은 신라의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기에 신라는 서로 사신을 교환하며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대야성의 함락이 상징하듯, 경명왕 때 신라는 급속도로 몰락하게 된다. 대야성은 신라 방어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대야성의 함락은 단순히 성 하나가 함락 당했다는 의미보다 그나마 경상도에서 유지했던 신라의 세력이 와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삼릉, 남산의 대표적인 등산 코스인 삼릉계곡이 위치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 공간이다. ©김희태

한편 삼릉과 경애왕릉에 대한 고증이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장지 기록과 현 위치가 맞는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특히 삼릉의 경우 아달라왕과 신덕왕 사이의 간격이 728년으로, 이런 형태의 왕릉 조성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삼릉 가운데 신덕왕릉으로 알려진 봉분이 도굴이 되어 발굴조사가 진행이 되었다. 그 결과 신라 후기의 묘제 양식인 석실분으로 확인됨에 따라 아달라왕이 살았던 시기의 묘제 양식과 차이를 보여 이러한 견해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경애왕의 비극적인 죽음과 망해가는 신라의 비극

경명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동생인 박위응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경애왕(재위 924~927)이다. 후삼국이 시작된 이래 군사적으로 가장 최약체에 가까웠던 신라였지만, 그럼에도 고려나 후백제는 영토는 빼앗을지언정 신라 왕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이는 신라가 비록 힘이 없어졌다 해도 천년에 가까운 사직을 이어온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호족들 가운데서도 신라에 우호적인 세력이 있어 이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신라 왕실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문율이 깨어진 것이 포석정의 비극으로, 이때에 이르면 신라는 나라가 멸망한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전면에서 바라본 경애왕릉의 전경, 삼릉의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당시 후삼국의 주도권을 두고 왕건과 견훤이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두 세력의 승부에 따라 신라의 운명이 결정될 순간이었다. 보통 이 경우 두 세력에 양다리를 걸치고 관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경애왕은 즉위한 이후부터 친고려 행보를 보였다. 이는 고려가 보여준 신의 때문이었는데, <삼국사기>에는 925년 고울부(지금의 영천)의 장군 능문이 왕건에게 투항했지만 고울부가 서라벌과 가깝다는 이유로 태조가 능문을 위로해 돌려보낸 기록이 남아 있으며, 더 나아가 경애왕은 후백제와 고려의 화친에도 우려를 표했다.

이 같은 신라의 친고려 행보는 결국 후백제의 침공을 부르게 된다. 신라로 진격한 견훤의 군대는 고울부를 함락시키기에 이르고, 이제 수도인 서라벌까지는 반나절이면 도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경애왕이 다급히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고 여기에 응한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구원을 왔다. 하지만 시간 싸움에서 늦었다. 서라벌에 입성한 견훤은 포석정에서 연회 중이던 경애왕을 잡아 스스로 자진하게 하고 왕비를 능욕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후 견훤은 헌강왕의 외손자인 김부를 왕으로 세우니 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경주 포석정, 경애왕의 비극이 담긴 역사의 현장이다. ©김희태

하지만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견훤이 쳐들어온 음력 11월에 포석정에서 유상곡수를 하며 연회를 했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당장 고울부가 함락되어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를 견훤의 군대를 두고 연회를 베푼다는 것은 당시의 관점에서 봐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삼국사기> 헌강왕의 기록에도 등장한 것처럼 남산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신앙과도 같은 곳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포석정의 성격 역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워낙 포석정의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경애왕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후백제군이 쳐들어오는데 연회를 베풀 다 죽은 한심한 왕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 속 경애왕의 모습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었다. 이미 경애왕이 재위할 당시 신라의 국력은 절망적이었고,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싸움에서 신라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어 갔으며 그나마 남은 땅마저 고려와 후백제로 속속 넘어가는 가운데 경애왕의 비참한 죽음은 사실상 신라의 최후와 다름이 없었다.

경주 나정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일성왕릉, 하지만 일부에서 경애왕릉이 해목령 아래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경애왕릉으로 보는 견해 역시 존재하고 있다. ©김희태

한편 경애왕릉의 경우 <삼국사기>에 ‘해목령 아래 장사를 지냈다’는 구절이 있어, 남산의 해목령이 구체적인 위치의 기준으로 등장했다. 해목령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현 위치보다는 오히려 일성왕릉으로 전해지는 고분이 경애왕릉으로 비정될 여지가 있고, 실제 일성왕릉의 안내문에도 이 같은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이처럼 삼릉과 경애왕릉은 외형적으로 볼 때 단순한 고분에 지나지 않지만 각각의 문화재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때, 이전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문화재를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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