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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울리는 오월화, 은방울꽃![김인철의 들꽃여행] 은은한 향 종소리에 담겨 번지네.
김인철 | 승인 2018.05.15 09:38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Convallaria keiskei Miq.

혼자서 산길을 헤매다가 나도 모르게 음습한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진하면서도 고상한, 환각이 아닌가 싶게 비현실적인 향기에 이끌려서였다. 그늘진 평평한 골짜기에 그림으로만 본 은방울꽃이 쫙 깔려 있었다.

5월의 숲은 ‘계절의 여왕’이란 말답게 더없이 싱그럽습니다. 이따금 봄비까지 내렸기 때문인지 신록은 더욱 푸르고, 온갖 야생화는 제철을 잊지 않고 풍성하게 피어납니다. 지난 13일 강원도 철원의 야트막한 산에 오르자 끝물의 연분홍 철쭉꽃과, 순백의 매화말발도리꽃과 고추나무꽃이 번갈아 나타나, 가는 봄을 후회 없이 즐기라고 인사를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울울해진 풀밭에선 벌깨덩굴과 는쟁이냉이, 미나리냉이, 나도냉이, 산괴불주머니, 알록제비꽃, 둥굴레, 각시붓꽃 등 키 작은 풀들이 희거나 노랗거나 붉은, 색색의 꽃을 피우며 절정의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즈음은 고사리, 곰취, 참취 등 산나물 채취 시기이기도 해서 순수한 등산객은 물론 꽃 찾아다니는 사람, 나물 하러 다니는 사람 등 적지 않은 이들이 해발 923m에 불과한 명성산을 바삐 오갑니다. “여기 좀 보세요. 이파리가 넓고, 밥풀 같은 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이게 뭔가요?” 초보 나물꾼 한 분이 인솔자에게 소리쳐 묻습니다. 키 작은 잡목들 사이 무심히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그늘진 평편한 풀밭에 그야말로 이파리가 넓고 무성한 풀이 쫙 깔렸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무심코 밟은 게 미안해 물어봤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꽃대마다 알알이 달린 꽃은 막 벌어지기 직전이어서 아쉽게도 그 향기를 실감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5월에 피는 야생화가 한둘이 아님에도,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월화’란 별칭으로 불리는 꽃이 바로 은방울꽃입니다. 아마도 은방울을 똑 빼닮은 앙증맞은 꽃의 생김새뿐 아니라, 순백의 꽃 색, 그리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는 진한 꽃향기 등의 3박자가 은방울꽃을 계절의 여왕 5월을 대표하는 꽃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종 또는 방울 모양의 순백의 자잘한 꽃송이가 매력적인 은방울꽃. 살랑 봄바람이라도 불면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듯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질 듯하다. ©김인철
©김인철

아니, 꽃이 깔려 있다기보다는 그 풍성하고 잘생긴 잎이 깔려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밥풀만 한 크기의 작은 종이 조롱조롱 맺힌 것 같은 흰 꽃은 잎 사이에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앙큼하도록 농밀한 꿀샘을 가지고 있었다.

은방울꽃은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데, ‘계곡의 백합(lily of the valley)’이라는 영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배수가 잘 되는 산골짜기에서 잘 자랍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시구(詩句)처럼, 은방울꽃의 진가를 알기 위해선 자세히 살피고 오래 관찰해야 합니다. 특히 넓고 긴 초록색 이파리가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탓에, 꽃을 알아차리고 감상하기 위해선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채 1cm도 안 되는 작은 은방울꽃이 눈에 들어오고, 그리고 꽃줄기마다 10개 안팎씩 달린 ‘방울꽃’에서 울려 퍼지는 잔잔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양편으로 시원하게 뻗은 이파리 사이 꽃대마다 10송이 안팎의 꽃송이를 앙증맞게 매달고 선 은방울꽃. 작지만 온 숲을 제압할 듯 당당한 모습이 ‘오월화’로 꼽힌 이유를 말해주는 듯하다. ©김인철

그뿐 아니라, 가까이 다가서야만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비현실적인 꽃향기를 맡고, 고급 향수의 재료로도 쓰인다는 은방울꽃의 매력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은방울꽃은 ‘화냥년속고쟁이가랑이꽃’이니 ‘바람난며느리속고쟁이’와 같은 발칙하면서도 기발한 옛 이름을 갖고 있는데, 꽃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고 날렵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진초록 이파리 두 장이 꽃대 양편에 길게 마주 선 모습이 마치 여인이 속고쟁이를 입은 채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6개로 갈라진 꽃잎 끝 부분이 살짝 보랏빛으로 물든 은방울꽃. 최근 강원도 홍천의 한 야산에서 이른바 ‘분홍 은방울꽃’으로 불리는 변종이 발견돼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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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은방울꽃은 키가 20~35cm에 불과하지만, 이파리는 길이 12~18cm, 폭 3~7cm로 넓고 풍성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반면 순백의 꽃은 6~8mm로 매우 작으며,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에 비를 피해 종을 이어가려는 절실한 본능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즉 종족 보존과 직결되는 꽃가루와 꿀을 보호하는 ‘우산 역할’을 하기 위해 꽃잎이 땅을 보고 동그란 원형을 그리고 있다는 설명이지요.

발밑에 쫙 깔린 은방울꽃 무더기. 전국의 산골짜기와 그늘진 산기슭에서 잘 자란다. 무성한 이파리 사이에 올망졸망 달린 ‘방울꽃’은 몸을 낮춰야 종소리와 향을 느낄 수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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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향이 난다고 해서 향수란(香水蘭), 방울처럼 생긴 난초라고 해서 영란(鈴蘭)으로도 불리는 은방울꽃은 ‘행복’이란 꽃말 때문인지 최근 유명 연예인들이 결혼식 부케 꽃다발로 사용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고 박완서 선생이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한 묘사가 그 어느 식물도감보다도 실감나기에 다시 인용, 소개했습니다. [논객닷컴=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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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atomz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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