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조이는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다. 딸이 상하이에서 살다 오면서 데리고 왔다.
길가에서 해산(解産)하고 있던 개를 발견한 어느 착한 분이 동물병원에서 무사히 출산시킨 뒤 딸에게 키워보라며 ‘억지로’(?) 맡긴 강아지이다.
아내는 물론 나도 강아지는 내키지 않아 그곳에 두고 오길 바랐지만, 손자들이 울고불고하여 데리고 왔을 것 같아 싫은 내색을 차마 하지 못했다.
환경이 낯설어 오자마자 여기저기 배변을 하며 무척 성가시게 하였으나 여섯달이 막 지난 강아지가 낯선 이국 땅에서 겪어야 할 이민 생활의 설움에 오히려 내 가슴이 더 아팠다.
동네 앞산을 날마다 다니는 터라 친구삼아 같이 다니기로 하고 무심코 둘이서 집을 나서려는데 집안에만 갇혀 지내던 탓에 계단에서 부터 꼼짝도 않고 버티는 항거(抗擧)에 어쩔 수없이 품에 안고 시작했다. 그 화려한 외출이 벌써 넉달이 지났다. 횡단보도에선 차들이 무서워 부들부들 떨기도 해 하도 안쓰러워 “놀라지말라, 담대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지금은 녹색 신호등이 켜져야 건너 갈 정도가 됐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산을 오르내릴 때면 우측통행을 하기도 하고 볼 일도 으슥한, 일정한 장소에서만 가려서 본다. 꽃을 보며 냄새를 맡고 마냥 즐거운 표정을 짓기도 하고, 동료들을 만나면 반가워서 꼬리를 치며 흥분하기도 한다.
조이의 이런 질서정연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삶의 모습을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인간이 만물의 척도일까?
벌써 꽃잎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봄은 만물을 소생케 한다지만 그 대상에 인간은 빠져 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의 나무와 잎은 부활의 모습으로 새롭게 중생(重生)하건만 인간은 어째서 지난 겨울의 가슴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신발을 벗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당시 유목민의 재산목록 1호인 신발을 벗으라는 뜻은 모세의 오래된 자아를 포기하고,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신으로 부터 벗어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예수님이 외롭게 처절한 고통의 삶으로 답했던 그 삶도, 절망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실존과 대면하고 내적 자유를 찾아 나서기를 바라는 또 하나의 명령이 아니겠는가?
무한경쟁, 이익의 극대화는 선과 악,우리와 적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 사고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논리가 사물이나 사건을 왜곡하여 결국 비참한 파괴와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 줬음을, 우리는 경험해 왔지 않은가?
인간은 아우슈비츠를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오늘 이 세계는 정말 정의롭고, 평화롭고, 풍요로운가?
빈곤, 무지, 질병, 환경, 부패 이런 문제들에 잘 대처하고, 또 해결하고 있는가?
지식은 사회의 공공재 의미도 지니고 있다.
진정한 지식인은 모름지기 자유인이다. 자기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하여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 더욱이 시대를 비껴가며 살았던 영악한 지식인은 오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허물고 늦봄이 전하는 바람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진정 우리가 머물 곳은 누군가의 가슴속 밖에 없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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