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나에게 있어 최초의 독서, 독서다운 독서는 중학교 2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경험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는데, 문예반 선생님이던 국어과 유영근 선생님께서 영어로 된 펭귄문고 책 한권을 선물하시며 여름방학 동안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도 아니고, 나만 문예반이 아닐진대, 또 특별히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필이면 왜? 라는 의문은 개학하고 나서야 풀렸다. 나를 특별히 기억하고 있던 김 선생님(영어)은 유 선생님(국어)과 서울대 사범대학 선후배 사이로서 가장 가까웠다고 하는데, 그들 대화 중에 ‘맞지도 않는 영어를 쏠랑거리며 이말 저말 하는 놈이 귀엽게 보였다’며 내 얘기를 주고받았고, 이를 귀담아 들었던 선생님이 이 책을 선물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책명이 뭔지는 정확히 기억할 할 수가 없는데 그 책 속에 있었던 한편이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책은커녕 놀기에도 시간이 빠듯했던 내게 그 책은 심각한 충격이기도 했지만,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영어실력으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최초의 독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책의 내용 자체도 퍽 감명을 주는 것이었다. 책의 내용이 우리의 근대사(일제강점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린 나이일지라도 나름의 의식은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소설에서 받은 충격으로 그 전까지는 조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에 점차 말려들었다.

알사스 로렌이 우리나라 처지와 어쩌면 그렇게 비슷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도 알사스 로렌처럼 슬픈 역사를 지녔구나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국어만 지키고 있으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일제시대 때 아버지가 배웠던 일본어가 아버지에겐 국어였나? 아니었나? 일본어가 국어가 아니었다면 한국어는 과연 우리나라의 열쇠였던 것인지...

그 책을 읽으며 나는 프랑스란 나라가 지리부도에만 있는 나라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구 어디엔가 분명히 실재하고 있으며 경제부 기자였던 삼촌이 프랑스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도 공부도 안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사는 소년이 있겠구나 하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이를테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으로 해서 시야가 막혀 있었던 나의 세계가 그 짧은 소설로 인해 세계대(世界大)로 넓혀진, 나에게 있어서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책을 시작으로 나는 이책 저책, 이제까지 내팽개쳤던 책들을 섭렵하며 열병 앓는 아이처럼 여름방학을 보냈다.

2학기가 시작되는 날, 나는 방과 후 유 선생님을 찾아 갔다. 마침 그는 김 선생님과 같이 계셨다. 유 선생님은 내가 말을 꺼내기에 앞서 그 책을 다 봤느냐고 물었다. 내가 나름의 감동을 얘기하자 김 선생님이 말을 받았다. “그것이 문학이란 거야. 훌륭한 문학은 그처럼 읽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거지. 너도 장차 그런 감동적인 소설을 쓰는 문학자가 되어 보렴”하면서 웃어주셨다. 김 선생님은 이어 보불전쟁의 결과로 프랑스 영토였던 알사스와 로렌이 독일영토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지막 수업>의 배경 설명까지 해주셨다.

나는 얘기를 듣다가 무심결에 “그럼 한 때 청나라의 속국이었다가 일본 땅이 되었던 우리나라 역사와 사정이 같군요.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어땠나요?”라고 말하며 김 선생님을 쳐다보니 곁에 있던 유 선생님이 “너는 문학이 아니라 정치학을 공부하는 게 더 낫겠구나”하며 등을 두드렸다. 그때 그 격려가 나를 끝내 사회과학 공부를 하도록 이끄는 힘이었음을 그분들이 그때 알았을 리 없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마지막 수업>은 내게 있어서 문학에의 개안과 동시에 세계에의 개안, 자아에의 개안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프랑스어로 된 원본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지만, 영어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던 동기의 바닥에는 그때 읽었던 <마지막 수업>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 후 누나에게 들으니 <마지막 수업>은 알퐁스 도데가 쓴 “월요이야기(Contes de Lundi)라는 총 41편의 꽁트 가운데, 소설 첫머리에 <어느 알사스 소년의 이야기>란 부제를 붙인 것이 바로 <마지막 수업>이란 걸 알게 됐다.

이래저래 알퐁스 도데는 내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작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또한 나의 문학적인 견식이 상당기간동안이나 도데를 넘어서지 못하게 한 마이너스 요인으로도 작용했지만 그 책을 내게 권해준 유 선생님(국어)과 김 선생님(영어) 또한 잊지 못할 선생님으로, 스승으로 고백할 수 있게 했으니 인생 전체로서도 중요한 책이었고, 작가였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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