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말머리]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급체를 한 밤이었다. 딱히 잘못 먹은 게 없는 듯한데, 이상하리만치 소화가 잘 안 되었다. 요즘은 편의점에서도 파는 게 상비약이라지만, 그래도 밤 11시에 다시 옷을 입고 편의점에 가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우리 집에는 소화제, 종합감기약, 해열제 등이 구비되어 있다. 다양한 제약사의 로고가 박힌 네모난 갑의 약들. 약 케이스에는 대표적인 증상 몇 가지가 눈에 잘 들어오게 크게 표기되어 있다.

콧물, 코막힘, 재채기, 알러지성 비염. 아, 이건 콧물약이네. 기침, 가래, 진해거담. 이것도 아닌데. 각종 염증, 화농증, 다래끼. 이런 약도 있었나? 소화불량, 과식, 식체. 이거다!   

©픽사베이

약을 먹기 전인데도 네모난 약 케이스들을 보면 괜히 안심이 된다. 먹고 한숨 자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든든한 믿음 혹은 그래 왔던 기억 때문. 자, 이제 약을 먹어 볼까나. 필자가 찾아낸 소화제를 입 안에 털어 넣기 전, 작은 글씨의 ‘사용기한’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통재라! 날짜가 지난 것이었다.

어디서 듣기에는 날짜 좀 지나도 괜찮다고 했는데, 라고 뇌까리고 있을 때 어머니가 거실로 나오셨다. “작년 날짜가 적힌 것이니 먹지 말고 편의점에서 하나 사 오는 게 좋겠다”며  “다행이네”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야밤에 편의점에 가야 하는 아들을 두고 다행이라니, 이럴 수가! 어머니는 이어 “약 사고 난 후에 아프지 않아서 약을 안 먹게 되는 게 결국은 제일 좋은 거지. 아주 비싼 약도 아니고. 이번 약도 오늘 먹고 또 몇 년 간 네가 찾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3000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의 상비약들. 집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가는 걸 귀찮아했던 아들, 그리고 아들이 오랫동안 약을 찾지 않고 버리게 되는 게 외려 기쁜 어머니. 역시 어머니 따라가려면 멀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어머니도 상비약을 급히 찾게 되는 일 없이 항상 건강하시기를, 다음에도 유쾌하게 약을 버릴 수 있게 되기를. 지금 우리집의 상비약 박스에는 쓰레기통으로 가게 될 날을 기다리는 약들이 켜켜이 포개져 있다. 앞으로 제 역할을 다 수행하지 않게 되길 고대하며.   

 석혜탁

대학 졸업 후 방송사 기자로 합격. 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대학 연극부 시절의 대사를 아직도 온존히 기억하는 (‘마음만큼은’) 낭만주의자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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