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말머리]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급체를 한 밤이었다. 딱히 잘못 먹은 게 없는 듯한데, 이상하리만치 소화가 잘 안 되었다. 요즘은 편의점에서도 파는 게 상비약이라지만, 그래도 밤 11시에 다시 옷을 입고 편의점에 가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우리 집에는 소화제, 종합감기약, 해열제 등이 구비되어 있다. 다양한 제약사의 로고가 박힌 네모난 갑의 약들. 약 케이스에는 대표적인 증상 몇 가지가 눈에 잘 들어오게 크게 표기되어 있다.
콧물, 코막힘, 재채기, 알러지성 비염. 아, 이건 콧물약이네. 기침, 가래, 진해거담. 이것도 아닌데. 각종 염증, 화농증, 다래끼. 이런 약도 있었나? 소화불량, 과식, 식체. 이거다!
약을 먹기 전인데도 네모난 약 케이스들을 보면 괜히 안심이 된다. 먹고 한숨 자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든든한 믿음 혹은 그래 왔던 기억 때문. 자, 이제 약을 먹어 볼까나. 필자가 찾아낸 소화제를 입 안에 털어 넣기 전, 작은 글씨의 ‘사용기한’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통재라! 날짜가 지난 것이었다.
어디서 듣기에는 날짜 좀 지나도 괜찮다고 했는데, 라고 뇌까리고 있을 때 어머니가 거실로 나오셨다. “작년 날짜가 적힌 것이니 먹지 말고 편의점에서 하나 사 오는 게 좋겠다”며 “다행이네”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야밤에 편의점에 가야 하는 아들을 두고 다행이라니, 이럴 수가! 어머니는 이어 “약 사고 난 후에 아프지 않아서 약을 안 먹게 되는 게 결국은 제일 좋은 거지. 아주 비싼 약도 아니고. 이번 약도 오늘 먹고 또 몇 년 간 네가 찾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3000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의 상비약들. 집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가는 걸 귀찮아했던 아들, 그리고 아들이 오랫동안 약을 찾지 않고 버리게 되는 게 외려 기쁜 어머니. 역시 어머니 따라가려면 멀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어머니도 상비약을 급히 찾게 되는 일 없이 항상 건강하시기를, 다음에도 유쾌하게 약을 버릴 수 있게 되기를. 지금 우리집의 상비약 박스에는 쓰레기통으로 가게 될 날을 기다리는 약들이 켜켜이 포개져 있다. 앞으로 제 역할을 다 수행하지 않게 되길 고대하며.
석혜탁
대학 졸업 후 방송사 기자로 합격. 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대학 연극부 시절의 대사를 아직도 온존히 기억하는 (‘마음만큼은’) 낭만주의자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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