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된 경순왕릉의 조성,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엇갈린 선택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경순왕릉으로 찾아가는 길은 경주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왕릉이라는 점과 불과 15년 전만 해도 민통선 내에 있어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한다. 물론 지금은 제한된 시간이긴 해도 상시 개방을 하고 있어, 접근성 자체는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진 편이다. 보통 신라의 왕릉이 경주에 조성되는 것에 비해 연천에 조성된 경순왕릉은 그 위치만으로도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단순한 능묘가 아닌 해당 문화재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때 경순왕릉이 들려주는 역사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경주를 벗어나 연천에 자리한 경순왕릉, 민통선 내에 자리하고 있어 지금도 긴장감과 적막감이 교차하고 있다. ©김희태

앞서 후백제 견훤의 서라벌 침공과 경애왕의 비극적인 죽음은 사실상 신라의 멸망과 다름없었다. 경애왕이 세상을 떠난 뒤 견훤은 헌강왕의 사위였던 이찬 효종(추봉 신흥대왕)의 아들 김부를 왕위에 올렸다. 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으로, 이때에 이르면 신라는 도읍인 서라벌을 제외하면 사실상 영향력을 상실한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했다. 당시 견훤이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경순왕을 옹립한 이유는 최대한 명분 있게 신라를 병합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즉 삼국지에도 등장한 바 있듯 위나라의 조비가 후한의 헌제에게 ‘선양’을 통해 황제의 자리를 이어 받은 사례를 염두에 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당시 신라는 과거의 명분을 먹고사는 비참한 신세였고, 따라서 신라가 망한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이었다. 다만 어떻게 망할 것인지 그것이 핵심인 시대였다.

고려로의 귀부와 신라의 멸망, 천년 신라의 종언

이미 독자적인 생존을 도모하기가 어려웠던 환경에서 신라의 운명은 타국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후백제와 고려 간 승부의 추가 기울어지면 자연스럽게 신라의 운명 역시 결정지어질 터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치는 후백제의 내분과 함께 고려로 추가 기울기 시작하는데, 당시 후계자 문제를 두고 내분을 겪었던 후백제에서 견훤이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유폐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견훤은 후백제를 탈출해 고려로 귀부하면서 한반도는 일대의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후백제의 견훤이 유폐된 금산사, 이후 견훤은 적국인 고려로 귀부하고, 스스로 세운 나라의 문을 거두는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 된다. ©김희태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경순왕은 고려로 귀부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귀부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로, 그는 사직을 보전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경순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경순왕의 입장은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있는데,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끝내 고려로의 귀부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992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라의 사직은 종언을 구하게 된다. 이때부터 신라의 도읍은 서라벌이 아닌 경주로 바뀌게 되고, 이 명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면에서 바라본 경순왕릉의 모습, 실전되었다 조선 영조 때 발견이 되어 이때 현재의 모습처럼 곡장과 석물이 세워졌다. ©김희태

경순왕의 결정에 대해 왕건은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와 혼인하게 하고, 유화궁을 내려주었다. 또한 경순왕을 ‘정승공(政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신분은 태자보다 더 높았다. 이와 함께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하는데, 우리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사심관(事審官)’이었다. 우리 역사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례를 봐도 경순왕의 대접은 매우 좋은 편으로, 훗날 고려가 망한 뒤 조선이 건국되자 공양왕을 비롯한 왕씨들이 학살된 사례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또한 경순왕의 귀부는 고려 왕실과의 혈연적인 관계로 이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의 딸과 왕건의 혼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왕욱(추존 안종)으로, 왕욱의 아들은 고려의 현종이었다. 즉 신라의 왕실과 고려의 왕실이 혈연으로 이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고려 안에서 신라계의 입지가 강화되는데, 이 같은 배경에 경순왕의 귀부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분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라산역, 이곳에 남겨진 경순왕의 행적은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희태

한편 분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라산역에는 경순왕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의 요지는 경순왕과 혼인한 낙랑공주가 경순왕을 위해 도라산에 암자를 지었고, 경순왕이 이곳에 올라 경주를 바라보며 그리워했다는 내용이다. 현재 도라산역은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이곳에서 경순왕 역시 갈 수 없는 고향을 향해 눈물을 흘렸던 아픔이 현재의 남북관계와 닮아 있다는 점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랑포에 조성된 경순왕릉, 경주를 벗어난 왕릉으로 남겨지다.

비교적 장수했던 경순왕은 978년 세상을 떠나게 되고, 전례에 따라 옛 신라의 도읍인 경주에 장지를 조성하려 했다.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 ‘왕의 시신은 수도에서 백 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구실로 제동을 걸면서 결국 고랑포에 경순왕릉이 조성된다. 때문에 경순왕릉은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왕릉이 되었는데, 이 같은 이유는 신라부흥운동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경순왕의 초상화,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김희태

이후 실전된 경순왕릉은 1746년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동지 김응호 등이 상소를 올려 경순왕릉의 지석과 신도비를 발견했다고 보고를 올리게 되고, 이에 영조가 새롭게 곡장과 석물을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다시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73년 다시 재발견이 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순왕릉의 비석에는 총탄 자국과 함께 ‘신라경순왕지묘(新羅敬順王之陵)’가 새겨져 있어 오랜 역사의 부침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경순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 ‘신라경순왕지묘(新羅敬順王之陵)’가 새겨져 있고, 총탄 자국 역시 확인된다. ©김희태

한편 경순왕의 귀부는 뜻하지 않은 나비효과를 낳게 되는데, 귀부를 거부했던 마의태자는 공식 기록상 개골산에 들어가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지나, 민간의 전설 혹은 지명은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에 직,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송막기문>과 <금사> 등의 기록을 보면 신라 혹은 고려의 세력 중 일부가 북방으로 흘러들어 그곳에 기반을 닦고 있던 여진의 한 무리에 합류하게 했는데, 이들의 후손 가운데 훗날 여진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가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배면에서 바라본 경순왕릉, 고랑포를 지나 멀리 경주를 향하고 있을 경순왕릉의 모습이 슬프게 다가온다. ©김희태

고려로의 귀부를 두고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선택은 고려 내에서 신라계의 입지를 강화한 측면과 함께 밖으로 나말여초의 시대적 격변 속에 신라 혹은 고려인의 후손에 의해 금나라 건국이 이루어진 역사의 나비효과라는 측면에서 주목해볼만하다. 이처럼 경순왕릉을 통해 격변의 시대를 이해할 수 있고, 지금도 여전히 남과 북이 대치하는 아슬아슬한 광경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말없이 흐르는 임진강의 물결을 따라 여전히 긴장감과 적막감이 교차하고 있는 경순왕릉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역사의 현장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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