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송의 어둠의 경로]

[오피니언타임스=서은송] 매 가을이 올 때면, 의무적으로 내가 가는 곳이 있다. 누구와 가는지에 따라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 또한 다양했었다. 가족끼리 갔을 당시에는 편안함과 묘한 안정감이 나를 풀어놓았고, 친구와 갔을 때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한숨이 나를 크게 조여왔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쓰레기 매립지 난지도에 갔을 때 색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수많은 발걸음을 남긴 기억의 공간이던 그곳은 어엿한 하늘공원이 되어 수많은 억새를 피워내고 있었다. 바람결에 몸을 서걱거리며 은빛물결이 가을바람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 아름다움 속에서 나는 문득 억새를 끊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픽사베이

끊임없이 위만 바라보며 자란 억새가 그날따라 유난히도 미워보였다. 쓰레기땅에서도 이렇게 예쁜 가지와 곧은 줄기가 피어나는데, 풍요로운 내 스스로에게서는 어째서 여린 이파리 하나 돋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억새 이엉 끝에 달린 새끼 끄나풀을 탁 잡아챘다. 애꿎은 억새에게, 내게 쌓여온 미래에 대한 부담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부담을 끊어내려하고 있었다. 억새는 억세게 끊어지지 않았다. 억새풀에 상한 상처가 아리기도 하고 가렵기도 했다. 금빛 설움 가득 품은 상처는 내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했는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나의 팍팍한 생활이 은회색 꽃을 피우기도 전에 꺾여버려서일까.

“엄마는 막내가 이 정도했다는 것에 만족해. 과정이 더 중요한걸... 그래도, 다음번에는 더 잘해보자”.
“아빠는 딸이 하고 싶다는 건 뭐든 다 들어줄게.”.
“은송아, 너는 절대로 언니처럼 꿈을 아빠한테 짓밟히지는 마. 근데 아무리 그래도 먹고 살 수는 있는 꿈을 꾸는 것이 맞는 것 같아.”
“내가 비록 연극을 하고 있지만, 여자가 다가서기에는 너무 힘든 길이야. 여자애들 힘들어서 거의 다 담배 핀다. 오빠가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너는 이 길로 오지마.”

나는 위만 보고 자라 뿌리를 튼튼히 내리지 못해 얕은 바람에도 큰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수많은 억새풀들이 기웃기웃하게 서 있었다. 이 말도 안되는 압박들과 냄새나는 땅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당연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억새의 울음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억새는 연신 울음을 삼키며 하염없이 울기만 한다. 은빛 구슬픈 울음을 풀어내지만, 그 어떠한 억새도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다. 파아란 가을 하늘 아래, 그을음 가득찬 길 속에서 나 또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내 스스로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꽃을 피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내 주변사람들은 내게 너무 부정적으로 변했다며, 철없는 행위라는 등 모두들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바람이 센 줄 알았는데, 내가 연약한 것이었다.

힘을 키워야겠다. 이미 깊게 박혀버린 뿌리를 빼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내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없다면, 조금은 아프겠지만, 뿌리를 잘라내 버려야겠다. 다시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해보는 것도 꽤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서은송

2016년부터 현재, 서울시 청소년 명예시장

2016/서울시 청소년의회 의장, 인권위원회 위원

뭇별마냥 흩날리는 문자의 굶주림 속에서 말 한 방울 쉽게 흘려내지 못해, 오늘도 글을 씁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