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오피니언타임스=황진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지난달 25일 공개한 조사 보고서의 파장이 심상치 않다.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을 놓고 ‘거래’를 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에서도 2015년 7월 양 대법원장의 박근혜 대통령 독대를 앞두고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대외비 ‘현안 관련 말씀 자료’가 눈에 띈다. 문건은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다”며 대법원 판결 사건 목록을 별지에 첨부했다. 통상임금, 과거사 국가배상 제한, 키코, 쌍용차 정리해고, KTX 승무원 정리해고, 교원노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사건 등 15건이라고 한다. 그 ‘증거’인 셈이다. 대부분 대법원이 1,2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대법원

특조단, 청와대와 ‘재판 거래’ 시도 문건 제시…판결 당사자들 거센 비난

2015년 3월 문건에서는 ‘사법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사건처리 방향과 시기를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교원노조 법외노조 사건과 함께 댓글 공작으로 기소된 전 국정원장 원세훈 사건을 거론했다. 상고법원 도입에 두 사건 재판을 지렛대로 활용하려 한 것으로 읽힌다. 원세훈 건은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당선할 수 있도록 국정원 댓글부대를 동원한 사건이다. 이 문건에는 원 전 원장에게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유죄판결이 난 데 대해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 사법부에 큰 불만 표시. 향후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 전원합의체 회부 희망’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비이락 (烏飛梨落)이라고, 우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5년 7월 ‘핵심 증거를 인정할 수 없다’며 2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소수 의견 한명 없이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판결이었다. 한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결론이 뒤바뀌었다. 파기 환송심은 지난해 8월 원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4년에 자격정지 4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11대 2의 다수 의견으로 판기환송심을 확정했다.

지난달 30일 ‘재판 거래’ 사건 관련자들은 서울 서초동 대법원 동문 앞에서 ‘법원 사법 농단 피해자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공동 고발 기자회견’을 열어 재심과 원상 회복, 국가 배상 등을 요구했다. KTX 해고 승무원들은 하루 전인 29일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사법정의를 쓰레기통에 내던졌다”며 김명수 대법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일부는 대법정으로 들어가 기습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해고무효 소송 1,2심에서 승소했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승소 후 밀린 급여를 받았던 승무원들은 이자를 포함해 1억원이 넘는 돈을 반환해야 했고 그 중 한 명은 어린 딸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재판 거래’, ‘판사 차별’ 실행은 없었다”… 양 전 대법원장도 전면 부인

그러나 특별조사단은 “문건 내용 대부분은 실행이 되지 않았고, 행정처가 사전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나온 판결 내용을 취합해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한 것일 뿐 재판 거래는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의 성향·동향·재산관계 등을 파악한 파일들이 존재했지만 조직적 체계적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부과했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역시 아직 미온적이다. 지난달 31일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통해 “참혹한 조사 결과로 심한 충격과 실망감을 느꼈을 국민 여러분께 사법부를 대신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면서도 “최종 판단을 담당하는 대법원이 형사 조치를 하는 것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을 포함한 관련자를 검찰에 고발하는 등의 후속 조치는 “사법발전위원회(5일), 법원장간담회(7일), 법관대표회의(11일) 및 각계 의견을 종합해 결정하고자 한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항변에 나섰다. 지난 1일 자택 근처 놀이터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법원 재판이나 하급 재판에 부당하게 간섭·간여한 바가 결단코 없다”고 했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재판을 활용해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하고,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하는 일선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문제의 문건들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랫사람이 한 것일 뿐이라며, 문건 작성을 지시하고 보고를 받거나 실행하도록 했다는 의혹을 반박했다. 특별조사단의 조사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해서도 “조사가 1년 넘게 세 번 이뤄졌고, 컴퓨터를 남의 일기장 보듯이 완전히 뒤졌다”며 “400명 정도 사람들이 가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사안을 밝히지 못했으면 그 이상 뭐가 밝혀지겠느냐”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제대로 조사 못했다’, ‘사건을 축소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 많아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은 물론 국민도 ‘양승태 대법원’이 ‘재판 거래’ 문건을 만들기만 했을 뿐 실행하지는 않았다는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 특별조사단이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등 ‘윗선’ 및 강제 수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제대로 조사를 했겠느냐는 의구심을 품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후폭풍을 고려해 사건을 축소하려 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적지 않다. ‘현안 말씀 자료’에 첨부된 대법원 판결들을 살펴보면 하나하나 인권은 저버리고 ‘애국적’이거나 박근혜 정부를 의식한 것으로 여겨진다.

‘블랙리스트’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조직적 체계적인 불이익은 없었다고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개별적 구체적으로 인사와 연수 등에서 불이익이 없었는지 조사해 봐야 한다. 게다가 설혹 ‘재판 거래’ 문건과 블랙리스트를 만들기만 했을 뿐 실행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만든 것만으로도 사법부의 독립과 신뢰를 저버린 것은 물론 판사들의 양심에 따른 재판을 막았으리라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인 의견인 것으로 보인다. 블랙리스트 얘기를 들은 판사들이 자기 검열 속에 재판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최기상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은 지난달 30일 낸 입장문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공정한 재판에 대한 기대와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사법부 스스로가 그 존재의 근거를 붕괴시키는 참담한 결과에 이르렀다”며 “헌정유린행위의 관련자들에 대해 그 책임에 상응하는 엄정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겠다”고 밝혔다. 이 역시 ‘실행’을 전제로 얘기한 것은 아니다.

©픽사베이

관련 문건 전면 공개해 투명한 검증 필요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일 법관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우리에게는 다시 제 뼈와 살을 도려내야 하는 긴 고통의 시간이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우리의 소중한 법원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희망의 여정이기도 하다”고 했다. ‘양승태 대법원’을 검찰에 고발할지는 11일 열리는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의견을 수렴한 뒤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발 여부와 관계없이 할 일이 있다.

특별조사단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4명의 컴퓨터에서 확보한 문건 3만 건 가운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있는 문건 410건을 추려 조사했다. 이 중 부분적·간접적으로나마 공개된 것은 174건 뿐이다. 나머지 중에서도 ‘BH 민주적 정당성 부여 방안’, ‘조선일보 보도 요청 사항’, ‘세월호 사건 관련 적정 관할 법원 및 재판부 배당 방안’, ‘문제 법관 시그널링 및 감독 방안’ 등 제목만 봐도 재판의 독립을 해친 것으로 보이는 문서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 홍보전략’ ‘조선일보 보도요청 사항’ ‘조선일보 방문 설명자료’ 등 10건에서 실명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다.

주권자인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 410건을 법관뿐 아니라 국민과 언론 앞에 공개해야 한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공개가 되면 진실 여부를 투명하게 검증할 수 있다. 그래야 특조단 보고서도 신뢰할 수 있다. 사건 당사자들은 물론 국민이 합리적인 의심을 품고 전면 공개와 해명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련자 고발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앞으로 ‘재판 거래’ 사건 관련자들의 사법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질 것은 불문가지다. 국민 역시 그 추이를 눈여겨 볼 것이다. 최종 판단을 담당하는 대법원이 양 전 대법원장 등 관련자들을 고발하는 것은 검찰 조사와 법원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문제를 확대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고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유야무야될 수는 없다. 이미 재판 거래 관련자와 단체, 개인이나 시민 단체 등의 고발이 여러 건이다. 고발하지 않으면 오히려 사법행정권 남용을 축소하려 한다거나 ‘한통속’이라는 비난을 살 수도 있다. 김 대법원장이 법관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표현했듯이 ‘우리의 소중한 법원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사법부의 미래를 위해 어느 쪽이 옳은지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공동대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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